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이사야 26:4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편 146:1-2
사는 날 동안 여러 근심과 걱정이 없을 수 없겠으나,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 26:4).” 하는 오늘 아침 말씀이 강하게 들린다. 늘 무언가 의지하고 의뢰하며 나름의 방식을 찾으려 드는 세상에서,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하는 시인의 외침은 간결하면서도 무겁다. 곧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 146:1-2).” 그것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은 것과 같다. 살아서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다. 듣고, 돌이켜, 따르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회개는 행함이다. 느낌이나 감정의 일이 아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행 8:5-6).” 듣고, 보고, 행함으로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8).”
그리하여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3-4).” 곧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다르다. 일상의 언어 같으나 그 의도와 목적이 다르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20:21).” 누구에게 권하고 위로하고 마주하는 일 모두는 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같은 말을 가지고도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17:18).” 서로 다른 언어는 서로 다른 사고와 삶을 지향하게 한다. 그리하여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5).” 곧 이는 거부할 수 없는 진리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행 17:3).”
저는 우리로 인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그가 우리에게 이르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로, 애통하며, 온유하게 삶으로 복이 있다(마 5:3-9). 이를 달게 듣고도,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막 6:20).”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이 불행이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행 24:25).” 즉 ‘달게 듣고도, 지금은 가라, 하고 거절하는 데야 별 수 없다.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우리들로 하여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2:37).”
나는 누구에게 누나네 교회 주소를 일러주었다. 지난번에 저는 마음의 동요가 일어 인천까지 왔다. 그리고 말씀을 달게 들었다. 감사하다며 여러 번 (뭐에 대한 감사인지) 그 마음을 표현하였다. 나는 그런 저가 안쓰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여 보다 가까이 갈 수 있는 교회를 권했던 것이다. 그럼 어떠할까? '달게 듣고도, 지금은 가라.' 하는 정도이면, 더는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일이다. 곁에서 이를 목격하면서 나는 오늘의 내 처지와 상황을 감사한다. 우리 안에 두신 놀라운 은혜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사 26:13).” 하며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3).” 하는 데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일이다. 이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8-31).” 주를 사랑하고 신뢰한다는 일은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었으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무엇을 숨길 수도 또는 보태어 드러낼 수도 없는 일이다. 반드시 죄는 드러난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눅 9:43-44).” 누구는 ‘달게’ 듣고, ‘지금은 가라’ 하고, 우리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바란다. 같은 세상에서 같은 날들을 겪으면서도 누구는 듣고, 보고, 돌이키나 누구는 듣고, 보고도 머뭇거린다. (나는 어쩌면 저가 이 묵상글을 읽는다면, ‘자기 이야기’를 인식하기 바란다.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물으시는 말씀을 되새기기를 바란다.) “예수께서 열두 제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 그러하실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대답은 무엇인가?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8-69).” 이와 같은 결연한 의지가 전부는 아니지만 전부의 첫 단계이기는 하다. 나는 누가 교회로 인도하심을 받기를 기도한다. 우리 의지만으로는 어렵다. 여전히 주저하며 망설이는 것에 대하여는 불가항력적이라, 뭘 어찌 우리 힘으로는 어렵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이를 바로 알 때 온전한 두려움은 우리의 가는 길을 재촉한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10:26-27).” 또한 나는 한 아이가 용기를 내어 교회로 온다는 데 큰 응원을 보낸다. 내가 왜? 하고 회의할 겨를도 없이 공황이 엄습하였고, 일상을 바꾸어놓았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고 주를 의지하는 노력은 귀하다. 이는 결코 개인의 결단이나 의지가 아닌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오라, 오라, 가라, 가라 하지 않는다. 올 사람은 오고 갈 사람은 갈 텐데, 이는 모두 주가 하시는 일이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가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은 살아서 산 자들의 땅에서 주께 돌이켜 주를 바랄 수 있는 것이다. 죽은 자에게 더는 소망이 없다. 그래서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5-6).” 억지로는 안 된다. 아픈 아이의 충동적인 욕구나 안 아프다고 자부하는 이들의 자기고집들이나… 우리는 스스로를 꺾을 능력이 없다. 오직 주께서 바꾸셔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2-14).” 어제는 그러하여, 짧고도 긴 가족여행이 인천으로 와서 뒤풀이를 하며 끝낸 셈이고… 다시 또 일상이 되었다.
아들은 저녁에 가정예배를 마치고 다 늦게 교회로 올라가 밤새 공부하다 새벽에 돌아왔고, 우리의 동선은 각자의 선택과 상황에 따라 고려되고 변경되어 모든 것이 주의 간섭과 주관하심 가운데 놓인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사는 게 아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살아서 사는 날 동안 회개하고 돌이켜 주와 동행하는 삶이 값진 것이다. 세상은 자꾸 ‘무엇을’,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어서 자신을 위해 살기를 요구하지만 나는 주께 더욱 바라는 한 가지 일,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삶이 아니기를.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17:15-16).” 그리하여 나의 전투는 치열하였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그러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우리의 절규는 자명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그러므로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시 146:3-4).” 오직 우리에게는…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8-9).” 이에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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