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이사야 49:16-17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14
누가 그 속을 알까. 저마다의 사연이 다 있다. 심지어 자신은 몰랐다 하고 스스로도 외면하는 일이 있다 해도, 그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우리 일상을 달아보신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잠 24:12).”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것일까? 싶을 때도, 그래서 자신조차 자기에게 속을 때에도.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사 49:16-17).” 나보다 나를 더 살피시고 보호하시고 감찰하시는 이가 계신다는 것. 곧 우리는 진리를 찾는 종교인이 아니고, 무엇으로도 정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것이다. 나의 입의 이 말이, 내 마음의 묵상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이를 사람만 모른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 말씀 앞에 앉아 그럼에도 주의 긍휼하심 앞에 놀라워할 따름이다. 고로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딤후 2:8).” 기억하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주의 날을 사는 일. ‘코로나19’로 인한 불안이 가시지를 않는다. 사람들의 안이함에 걱정이 앞선다. 아들의 열심 앞에 나는 마음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공부 안 했으면 좋겠어, 나의 철딱서니 없는 말에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요즘은 아들이 새벽 서너 시에 들어오는 소리에 깬다. 화장실에 갔다가도 아이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으면 그때부터 잠이 달아난다. 하루 종일 인터넷 강의를 듣고 성경보다 두꺼운 책을 서너 권씩 펼쳐놓고 공부를 한다. 나는 힐끔거리며 아이를 보다 그저 마음이 안타까워서 그만했으면 싶다. 모르겠다, 나는. 나는 그처럼 죽어라 하고 열심을 다하는 삶에 대하여 안타까울 따름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조카아이는 이틀이 멀다하고 술에 취해 들어오고 쉬는 날이면 TV 앞에 널브러져 시체처럼 늘어져있다고 한다. 그러니 대학에 가느라 죽어라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취업을 준비하느라 죽어라 또 공부해서, 고작 사는 일이란 게 그 모양이라. 남들은 대기업 운운하고 연봉을 따지며 직장생활이 다 그렇지, 하고 받아넘기지만 나는 그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그게 어디 그 애만의 모습이겠나? 다들 그만그만한 열심으로 그만그만하게 잘 사는 것을 꿈꾸지만 그래봐야 그 타령이 그 타령이라. 다, 그렇지. 인생 뭐 있나? 하고 내뱉는 말에 나는 종종 상처를 받는다. 그러니 종종 아들의 관심도 다를 게 없어서… 나는 괜히 속상하다. 너무 열심히 살지 마, 하는 이 말이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비성경적인 표현이겠나만, 내 말은…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모든 날의 은총은 스스로의 열심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 가운데서라는 것, 오늘 시인은 그것을 노래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2-4).”
다들 죽어라, 하고 열심을 다하지만 그 목표가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이 고작인데, 오늘 시인은 아니다. 말씀뿐이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곧 ‘말씀은 완전하여 우리 영혼을 소성(새롭게)한다.’ 또한 ‘말씀은 확실하여 우둔한 우리를 지혜롭게 한다.’ 그러므로 ‘말씀의 교훈은 정직하여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한다.’ ‘말씀은 순결하여 우리 눈을 밝게 한다.’ ‘말씀은 정결하여 우리로 영원까지 이르게 한다.’ ‘말씀은 진실하여 다 의로우시다.’ 곧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나에 대한 하나님의 집중이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여지없는 사랑이다. 그러는 중에 우리는 지금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영광을 바라는가? 현재 누리고 있는 영광은 무엇인가? 지난 주일 설교 원고를 뒤적거리며 묵상하였다. 주가 말씀하신다.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잠 23:15-17).”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날이 날에게 밤이 밤에게 전하는 지혜였다. 곧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19-20).”
누구는 너무 많이 가지고, 배우고, 누리고 있어서 모른다. 저의 신앙은 낭만적일 뿐이다. 어디 수도원을 묻고 ‘이럴 때’ 그런 데나 들어가서 며칠 푹, 쉬다 왔으면 좋겠다는 소리에 나도 꿈을 꿨다. 다들 지친 영혼이라.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누가 아침 출근길에 이 일 저 일 들려주는 저의 이야기에서 나는 피로를 느낀다. 저의 열심이 저를 고달프게도 하는구나! 늘 보면 열심히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이미 끝난 이야기를 여전히 되풀이 한다. 안 해도 될 일에 너무 열심이다. 아,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이사야는 주의 말씀을 외치고 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모두는 주의 입의 말이다(사 40:1-5). 마치 자신이 자신의 뭐라고 기진할 정도로 애써 수고하여 죽기 살기로 사는 모양인데, 그러니 그저 심신이 피곤할 따름이다.
오늘 아침에는 아내가 친정에 가지 않는다. 조카 녀석이 월차를 내고 쉬는 날이라 연로하신 장모님을 돌보는 요양사도 오지 못하게 하였단다. 상전이 따로 없다. 늘어지게 자는 동안 다들 쥐죽은 듯 조용해야 하고 낮 동안 집안에 널브러져 있을 때면 아무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 나름 배려이겠으나 이 무슨 개망나니 버릇인가 싶다. 수고한 데 따른 나름의 보상이다. 아, 그러니 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니 그렇다 쳐도 나름 믿고 의뢰하며 신앙이 좋은 상태를 유지한다고 하는 이도 강원도 태백에 있는 무슨 수도원을 꿈꾸고 낭만에 젖은 안식을 바라는 일이다. 그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일찍이 말씀하셨다. “명절 끝날 곧” 다들 열심히 살았던 그 “큰 날에” 말이다.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 영혼들의 갈급함을 아시는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39).” 그런데 우리의 쉼은 고작 TV 앞에 널브러지는 것이다. 손바닥 안에 핸드폰을 들고 키득거리는 일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정작 주의 말씀이 들리기는 하겠나? 한없는 무거움에 눌려 있으면서도 주의 부르심에 응할 수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일이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새벽 네 시가 다 돼 아들이 들어와 잠들었다. 나는 그 소리에 잠에서 깨서 조용히 말씀 앞에 앉았다. 아내는 오늘 조금 더 자도 된다며, 친정에 안 가도 되는 이유를 저녁에 말해주었다. 나는 저들의 열심이 안쓰럽다. 그 수고가 마음 아프고 속상하다. 이내 우리의 가장 큰 쉼은 그의 이름 앞에 앉는 일이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그리하여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도 그의 손이 하신 일을 나타내는데,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우리는 대체 무엇으로 사는가?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5-6).” 사람만 모른다. 그런 사회에 산다. 그러할 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4).” 곧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34: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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