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전봉석 2020. 6. 9. 06:08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이사야 46:4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

 

 

사람 일 누가 알겠나.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주께 아뢰며 주께 간구하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염려는 그 목적이 있다. 사는 데 따른 염려가 어찌 떨쳐낼 수 있겠나. 그러나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46:4).” 하는 오늘의 말씀이 마음을 울린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16:11).” 누가 결국은 정신과에 갔다. 약을 처방받고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였다. 일부러 그러시는가. 나는 그저 속상하고 마음이 쓰였으나 괜찮다며 위로하였다. 서로의 영이 서로를 위로한다. 서로를 주께 아뢰며 주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바, 그 하시는 일을 알고 이해하고 교감할 수 있었다.

 

상실한 영혼으로 사는 이 땅에서 그 자리를 염려가 가득 채웠다. 그저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대치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아이들이 이상해졌다. 1 여자 아이 둘이 화장을 하고 어찌나 꾸몄는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춤을 배우고 노래 학원을 다닌다고 하였다. 대중문화가 우리 영혼을 허기지게 한다. 3 아이는 거짓말과 잔꾀가 극에 달해 그 부모도 두 손을 들었다. 그러니 저들을 어쩐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우리 능력과 노력으로 될 게 아니다. 보내시는 이가 또한 감당할 수 있는 힘도 더하시기를.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2-13).” 누굴 탓하고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안타까움이라.

 

그러니 어쩐다? 본인도 당황스러운 것일 텐데, 염려가 없을 수 없는 세상에서 왜 자꾸 염려하지 말라고만 하시는 걸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6-7).” 이는 의연하고 초연하게 살라는 소리가 아니다. 염려의 또 다른 측면을 보게 하신다. 어차피 신앙이 좋든지 좋지 않든지 염려는 동행한다. 누구보다 염려할 게 없을 것 같은 솔로몬도 삶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2:23).” 그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일까? 그럴 수 있는 길은 기도뿐이다.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하면서, 바울은 우리가 우리 염려로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할 것인지 염려만 하고 있을 것인지! 염려로 염려를 할 것인지 염려로 기도를 할 것인지! 기도와 간구, 구하는 일은 모두 같은 맥락으로 더해지는 기도다.

 

그러할 때 놀라운 것은 감사를 발견하게 된다. 염려 때문에 기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기도하다보니 염려는 그대로 있는데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고 있는 것이 기도다. 희한한 일이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주께 아뢰고 간구하고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었는데, 기도의 특효는 그러다보면 감사할 게 참 많았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엄연히 염려만 보이던 게 것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이 이러고 있는 나를 모르시겠나? 나의 사정과 형편을 정말로 알지 못하시겠나? 오히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 내가 지금 불안으로 또는 우울과 초조함으로 기어이 약물에 의존하고 정신과를 들락거려야 하는 신세가 되기까지 모르고 계시겠나? 아니었다. 염려 때문에 못 살겠다고 기도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기어이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면서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고 계셨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4:6-7). 나는 누구의 연락을 받고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 하고 주의 이름을 불렀다.

 

예수 이름으로 아뢰고 기도할 수 있다는 이 특권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기도는 직분이다. 사명이며 내 손에 들린 무기다. 기도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기도를 하다보면 더 욕심이 생기는데 이는 말씀을 좀 더 바로 알아야겠다는 욕심이다. 마치 아이가 재미로 시작한 유튜브인데 하다 보니 더욱 욕심이 생기면서 장비도 구하게 되고, 편집하고 음향을 까는 기술도 익히게 되면서 여러모로 더 알고자 하는 욕심이 드는 것처럼, 기도도 그저 막연하게 시작하여 주님, 하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더 바르고 더 온전한 기도를 사모하게 되는 일이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쓸데없는 소리할 거 없다(6:5).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하시는 주의 말씀이 생경하지 않은 것은 기도하면서 더욱 바르게 기도하기를 바라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생의 이런저런 사연을 누가 다 알아주겠나? 사람 다 소용없다. 가장 가깝다는 가족도 별 수 없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 오직 주만 바라며 은밀한 중에 아뢰는 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7).” 그저 주님, 하고 더는 잇지 못하는 말들까지도 주님은 다 아신다. 이미 다 아시는 주님께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 비로소 우리는 기도를 배운다. 염려의 역할이다. 안정제를 먹고 불안과 우울과 초조를 다독이며 남은 생을 살아야 한대도,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이것이 우리 생의 목적이다. 창조의 이유다. 그러할 때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9-10).” 그 발판에 오늘 우리의 염려가 있었다. 어떤 서러움이 또는 답답함이 마음을 우울하게 하는 것 같았으나 돌아보면 염려도 사명이어서 그것으로 기도를 배우는 거였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11-13).”

 

내가 사는 날 동안에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 인생을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기를. 그리하여 나의 염려조차도 주께서 맡기시는 사명으로 알고 그것으로 누구를 위해 기도한다. 저를 위하고 사랑한다. 이 사랑은 주님의 마음이지 내 것이 아니다.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녀석은 또 무슨 티셔츠에 꽂혀서 오후 네 시가 다 될 때까지 백화점으로 쇼핑세터로 싸돌아다니며 옷을 고른 모양이었다. 그러니 아이의 병적인 집착을 어쩌면 좋을까? 아무리 뭐라 하고 알아듣게 타일러도 소용없는 이 땅에서의 삶이라니! 나는 저 때문에 불안해서도 안정제가 줄지를 않는다. 불안은 여전하고 염려는 가실 줄을 모른다. 여전히 우글거리며 언제 어디서 밟히고 물릴지 두려움이 가중될 따름인데, 기도의 유일한 이해는 이것으로 구원을 배운다는 것이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1:13).”

 

내 안에 이는 온갖 생각이 문제가 아니라, 그러니 그 염려로 염려만 할 것인가 염려 때문에도 기도를 할 것인가? 기도가 시작되면 미처 알지 못했던 감사들이 어쩜 그리도 많이 발견되는지. 결론은 하나님이셨다. 늘 내 곁에 한결같으신 이가 계셨다는 것을 알면서 염려도 사명이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염려는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를 하면 염려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더는 아무 것도 아닌, 평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제는 혼자 누구의 연락과 아이의 짓을 두고 생각이 많고 염려가 일다가 기도를 더하게 되었다. 아니면 할 게 없는 나의 빈손이 감사하였다. 그리하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46:4).” 하시는 말씀으로 됐다. 그러니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9).”

 

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16:1).” 고로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2).” 기도가 염려도 감사하게 하였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7).”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