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전봉석 2020. 6. 18. 06:03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사야 55:7-8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시편 25: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4-5).” 이어지는 시의 기도를 따라 읊조린다. 우리가 주를 바란다는 것은 빛의 자녀로 사는 일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5:8).” 이는 먼저 오래 참음으로 드러난다. 무엇에 대하여?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곧 우리는 주의 긍휼하심을 나타내야 한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86:15).” 그러하신 주의 긍휼하심으로 살았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34:6).” 그처럼 살고 싶은데 그것이 결국 마음먹는다고 실천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곧 빛의 자녀란 자신의 인내로 자신의 영혼을 얻는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21:19).”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었다. 나를 주체할 수 없는 게 사람이다. 그만큼의 억제와 순응이 따를 때 자유할 수 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가령 거대한 범선은 넓고 깊은 바다를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물의 깊이와 풍량의 제약을 따라야 한다. 삶의 가치도 자유의 양으로만 측량할 수는 없다. 자유를 통해 어디로 도착하는 게 아니다. 자유는 목적이 아니라 시작이다. 아이가 종종 답답함을 호소하며 억제되는 것을 항의한다. 그럴 때 아이를 무방비상태로 놓아두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아이들의 자유는 방종이 되었고, 이를 통제할 수 없는 맞벌이 부모들은 난감하다. 폐인처럼 하루를 지내기 일쑤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으로, 살만 찌고 게을러졌다. 전에 글방에 다니던 아이를 길에서 만날 때면 하나같이 엄청난 뚱보가 되었다. 먹고, 자고, 노는 일에서 자유함을 느낀다고 하니. 인내가 없는 자유는 자기 파괴와 같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6:16-19).” 결국은 주가 싫어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오늘 이사야서는 우리를 불러 세운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5:7-8).” 돌아오라, 돌아오라.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곧 주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이를 가장 여실히 증명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자유에 대한 열망인 듯하다. 세계 곳곳에서 인종차별에 따른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저마다 자유를 외치며 개인의 자유를 우선한다. 나는 저들의 데모에 동의하지만 전적인 찬성은 아니다. 그 단적인 예가 한쪽에서는 약탈과 방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규제와 억제가 없을 때 자유는 엄밀하게 방종이 된다. 이를 위해서도 하나님의 길,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어야 한다.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5:21).” 자유는 그만한 인내의 산물이다. 그저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자유도 아니고 그런다고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범선이 멋대로 질주하고 바람을 거스르면 더 큰 재난이 따르듯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우린 정확히 보고 들은 바를 따른다. 정해진 항로를 따르고 그때마다 날씨예보에 귀를 기울이며 바람의 방향과 그 세기에 집중한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7).”

 

오후께 직거래를 처음 했다. 자전거를 타지 말라는 병원의 경고에 그동안 처박아두었던 자전거를 꺼내서 닦고 어디 중고장터에 올렸더니 바로 연락이 왔다. 근처에 사는 한 자그마한 아주머니가 왔는데 올려놓은 금액보다 만원씩 만원씩 4만을 깎아서 가져갔다. 아내와 딸애는 그럴 줄 알았다며 가족 카톡에서 키득거렸고, 아들은 가만히 따라나서서 보고만 있었다. 저만치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서운함이라고 해야 할지 묘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처음 중고직거래를 통해 물건을 팔면서 새삼 느낀 것도 그 안에서의 존중과 예절이 그와 같은 자유거래를 성사시킨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 조금은 꺼렸었고 두렵기도 하였다. 오죽하니 공부하고 있는 아들을 채근하여 데리고 내려갔을까. , 힘써야 할 일이다. 우리에게 두시는 자유는 하나님과의 사귐으로만 자유로울 수 있다. 아니면 자칫 돈과 이익에 눈이 멀 수 있다. 자유에는 의무가 따르고 그 의무는 즐거움을 더한다. 그런 사이트가 있는지도 몰랐고, 거기에 가입하여 첫 거래가 성사되기 전에 저들이 강조하는 '지켜야 하는 의무'에 대해 숙지하였다. 결국 제약 없는 자유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은 것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말씀이 그렇듯 여겨질 때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1-32).” 자유는 솟아난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8:10).” 주의 법이 내 안에서 자유롭다고 여겨질 때 더는 규제가 아니라 잘 깔린 도로 같은 것이다. 율법이 무조건 무거운 의무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려야 하는 자유의 권리를 보장하고 확대하는 거였다.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후 3:2).” 곧 우리가 사는 삶의 형태는 의무가 따른다. 제약이 필연적이다. 그리스도인답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이란 저들과 다른 것을 추구하고, 어떤 목표를 향해 죽어라하고 애쓰기만 해서 얻어내는 결과가 아니라 주가 함께 하시는 자유로움에서의 즐거움이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17).”

 

저는 그렇듯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오셨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만 마음껏 자유할 수 있다. 마치 물고기가 물 속에서 새가 하늘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성경은 이를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곧 우리의 한계는 무한정 주어지는 자유를 자유롭게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앎으로 자유할 수 있다. 돈이든 명예든, 무엇을 목표로 삼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달려가든지 그 최종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곧 하나님으로만이 자유로운 것이다.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이를 일깨우면서 우리가 그럼 어찌 해야 하는가를 알게 한다. 곧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25:1).” 우러러본다는 것은 전심으로 공경하고 쳐다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주님을 우러르며 사는 것은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하고, 존경하면서도 가장 편하고 은밀하게 내 모든 것을 내어맡기면서,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바라봄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15).” 내가 어디에 걸려 얼마나 오랜 세월을 버벅거리며 그물에서 풀려나지 못했는가를 잘 안다. 그러니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21).”

 

나는 주를 바란다. 이제는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내가 누리는 자유는 주 안에서의 자유다. 그러할 때 이사야서가 손내민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55:1).” 주의 은혜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2).” 오늘 하루도 주의 긍휼하심 가운데서 참자유인으로 살 수 있기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