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
이사야 57:2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편 27:1
주께 나아가고, 그 안에서 쉼을 얻으려 하며, 주를 따르려는 마음으로 주께로 나의 중심을 기운다면 그 결과는 온전히 하나님이 지신다. 일찍이 주께서 그리 약속하신 말씀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내 책임이 아니다. 교회가 부흥을 못 하는 것도, 내가 이 모양으로 늘 주께 송구할 따름이라 해도, 내 수고와 내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구원은 없었다. 가령 내가 주께로 쉼을 얻지 못한다면 ‘쉬게 하리라.’ 하신 말씀은 빈말이 된다. 주의 멍에를 메지 않으면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신 말씀이 우습게 된다. 그러면서도 주를 바라고 구한다는 믿음은 가짜이거나 자기 모색일 뿐이다. 오늘 이사야의 말씀도 동일하다.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리라(사 57:2).” 내 안에 평안이 없다면, ‘평안에 들어갔다.’는 말씀과 ‘편히 쉬리라.’는 말씀은 빈말이 된다. 하나님은 빈말을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럼 그게 그렇게 어려운 까닭은 무얼까?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점검할 필요가 있겠다. 사랑은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자세를 버린다. 사랑은 포기함으로 자유함을 얻는다. 한쪽만 사랑하면 착취와 억압이 된다. 사랑은 늘 ‘당신이 먼저다.’ 당신에게 맞춘다. 당신에게 포기한다. 당신을 위해 희생한다. 당신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좋아한다와 다르다. 좋은 것은 싫은 것의 상대적이다. 싫은 게 괜찮아지면 좋은 것은 희석된다. 옅어지고 헐거워진 좋아함은 안 좋아함과 크게 차이가 없다. 싫지 않으면 다 좋은 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때로 잔인하다. 내 의지의 몫이 아니다. 가령 어제 저녁 가정예배를 드리기 전에 서로들 둘러앉아 이런저런 말을 나누는 가운데 나는 아들에게 뭐 해줄까? 이거 해줄까? 이건 어때? 하면서 무엇에 대해 물었다. 워낙 뚱하니 말수도 적은 터라, 아무런 대꾸가 없자 아내와 딸애가 ‘말을 좀 해!’ 하면서 타박을 하듯 장난을 걸었다. 그러자 녀석은 ‘나한테 너무 관심두지 마!’ 그러는 것이다. 순간 나는 가슴이 먹먹하였다. 괜히 서로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네가 관심을 두지 마! 하는 것처럼 내가 관심을 두는 것에 너도 관심을 두지 마!’ 하고 말장난을 하듯 들어 넘겼다. 내 안에는 아이에 대한 강한 부채감이 있다. 빚진 마음으로 나는 늘 속상하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사랑은 참 잔인한 것이다.’
나는 오늘 이사야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한다.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57:16).” 나의 죄와 허물로 죽으시기까지 하신 이가 나의 영과 혼이 피곤할까 걱정하신다. 그런 내게 평강을 더하신다. 나를 고치신다. 나를 창조하신 이시다.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19).” 아내와 딸애도 마음이 그러했는지, 예배 마치고 다들 운동을 나가면서 슬쩍 내 어깨를 토닥이며 너무 서운해 하지 마, 속상해 하지 마, 하고 귀띔하듯 말하였다. 나는 그러한 내 안의 ‘일방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내 영혼의 자유는 주밖에 없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종종 느끼는 일이지만 인생은 한꺼번에 여러 장의 글이 쓰이는 것 같다. 아니면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 느낌이다. 실은 나의 고질적인 독서법이라 최소한 서너 권 이상을 하루에 겅중거리듯 같이 읽는다. 집에서는 아빠로, 부모에게는 자식으로, 누구에게는 목사로, 친구로, 동료로… 그러할 때 나의 정체성이란 일관되고 통일돼야 한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르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어디서든 나 자신이었으면 좋겠다.
자신에 대한 인식과 자존감은 다르다. 자기가 느끼는 게 자존감은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고리타분한 철학적인 사고를 하려는 게 아니다. 성경은 뭐라 하시는가? 위선을 떨지 말라고 하신다.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말미암아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하지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 아니냐(사 57:11).” 다시 말해서 하나님만 경외하라는 소리다. 아무런 반응도 없고 변화도 없고 소용도 없는 것처럼 잠잠하시다 해도, 그래서 내가 수고하고 무겁게 지고 사는 것들은 우상일 뿐이다. 그거야말로 헛되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들에게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 바람에 날려 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오직 주를 의지하고 믿는 믿음으로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13).”
이는 결코 빈말이 아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15).” 주는 나를 창조하셨고, 내 입의 열매를 창조하셨다. 나에게 평강을 주시려는 것이다.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19).” 내 영혼의 평강을 원하신다.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16).”
이렇게 나를 아침 일찍 깨우시고 말씀 앞에 앉히시는 이유다. 공연히 아이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속상해할 거 없다. 그 마음으로 오히려 주님의 마음을 배운다.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18).” 이 놀라운 은혜 앞에 마음이 녹아드는 것 같다. 요즘은 다들 자기 내면을 봐야 한다고 하고, 내면에 트라우마를 운운하거나 ‘깊은 상처’를 논하며 온통 자가진단을 하듯 자신에게 집중한다. 하지만 성경은 이를 개인의 문제에서 찾지 않고 공동체의 문제로 확대한다.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19).” 왜 나의 입술의 열매, 말이 중요한 것일까? 믿는 자의 말에는 어떤 권세와 위력이 있는 것일까?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45:24).” 곧 우리 믿는 자의 혀는 주의 것이다.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시 34:13).” 그러므로 지혜자는 단호하게 충고하였다.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전 7:21).”
정작 두려운 것은 내가 누구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저에게 들을 나에 대한 말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욥 33:13).” 우리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착각을 하며 살아가고 계시는가! 그러는 자에게 오늘 이사야서는 일갈한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1).” 내면의 자아에서 무언가 표출해야 한다는 식의 착각은 이 시대의 가장 큰 오류다. 오히려 죄책감은 공공의 질서를 위해 유익하다. 내가 아들을 보면 늘 마음 한편이 아리고 미안하고 속상한 것에 대해서 그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으로 나는 아이를 더 사랑한다. 나의 사랑이 터무니없어서 주의 이름을 되뇐다. 주께 의뢰한다. 나의 빚진 마음조차 주께서 선용하심으로 선으로 갚아주시기를. 원래 ‘내면의 갈망은 가장 이기적인 것’이라고 심리학의 대가 프로이드도 말했다. 그게 얼마나 변덕스러운가. 덧붙여 ‘타협 없는 혼돈이고 거부할 줄 모르는 원초아’라고 하였다. 가장 미성숙한 게 자아인 셈이다.
아들애가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달아났다. 시간을 보고 안쓰러움에 뒤척이다 일찍 일어나 말씀 앞에 앉았다. 의지할 데는 주님뿐이다. 내가 아이에게 미안해하는 마음조차 실은 면목이 없다. 부질없는 것이다. 그럴 거 없다. 그래봐야 소용없는 것에 대하여는, 아무리 뻔뻔하다 해도 주님께 책임을 돌리는 수밖에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안 그럼 빈말이 되는데?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안 그러면 빈말이 되는데? 그러실 리 없다. 염려하지 않기 위해서도, 아침 일찍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께 아뢴다. 기도뿐이다.
다만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얼마나 감사한가? 나는 개떡 같았는데 하나님은 찰떡 같이 아들을 길러주셨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하나님이 이만큼 반듯하게 세워주셨다. 남은 우리 모든 생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4).” 가만히 주를 바라고 주를 의지하며 주님으로 만족하는,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5).” 하는 말씀으로 ‘아멘’할 따름이다. 안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빈말이 되는데? 그러므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8).”
고로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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