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이사야 63:7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시편 33:18-19
천지를 창조하시는 일보다 한 영혼을 돌이켜 죄에서 구원하시는 게 더 어려우셨다. C. S. 루이스는 이를 <존재론적 딜레마>로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선이시고 악은 있을 수 없는 분이심으로 절대 선인 그 하나님이 우주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아무 소망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날마다 죄를 짓는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죄 속에 사는 우리 자신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없고, 하나님과 함께 살 수도 없는 관계가 되었다.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 앞에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근본을 흔든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8-9).”
세계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실 수 있었어도 우리는 손수 하나님의 성품과 모양대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 그러한 우리는 죄를 선택하였고 그 죄 값을 감당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0-12).” 우리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오셨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다. 누구도 자기 노력으로 그 값을 대신할 수 없었다. 십자가가 아니면 우리의 구속도 없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이와 같은 말씀은 익히 들어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다시 읽거나 상기하여 묵상할 때면 어떤 감격이 내 안에서 출렁거린다. 부끄럽고 송구한데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십자가에 대해 루터는 ‘자리바꿈’이라 하였다. 나의 죄인의 자리에 예수께서 서시고 예수님의 의인의 자리에 나를 세우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다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신다! 나의 회개가 나를 정화시키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게 하는 것과 같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 10:17).” 그러므로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가령 턱걸이 운동기구를 하나 샀다. 아들은 계속 됐다고 하는데 철봉에 자주 매달리고 허리를 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임의로 그냥 주문을 하였다. 앞서 의자도 그랬는데, 요즘은 이게 다 낱개로 포장되어 왔다. 일일이 설명서에 따라 조립을 해야 한다. 그야말로 내가 가장 어려워하고 인내심을 갖고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또, 한다. 특히 철봉은 온통 다 쇳덩어리라 그 무게도 장난이 아니고 조이는 나사들도 한참을 돌려 꽉꽉 조여야 하는 일이었다. 기껏 다 조였는데 넓적한 철사이판이 여러 장 봉지에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붙들어주어 힘을 지탱하는 것이었다. 다시 풀고 그것을 먼저 끼우고 새로 조여 조립을 하면서… 조금 유치하지만 나는 주의 사랑을 묵상하였다.
우리 안에 이 마음이 있었으니, 하나는 감격과 감사와 기쁨이다. 십자가가 주는 마음이다. 둘은 그러므로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의지다. 그럼에도 수시로 드는 염려와 근심과 음란과 비난하는 마음을 주체할 길 없으나 의도적으로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려는 것이다. 셋, 이 좋은 소식을 누구에게 전하고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나는 누구에게 나의 이와 같은 감격, 나의 소소한 일상에서 느끼고 감사하는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을 함께 나누고 싶다. 말해주고 싶고, 그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말리고 싶다. 노아는 방주를 짓다말고 가까이 하는 이웃들에게 그와 같은 심판의 경고를 알려주지 않았겠나? 롯과 그의 가족들이 소돔과 고모라성에서는 또 어쨌을 테고.
그러나 듣는 이 적고 같이 믿는다 하는 사이에도 이런 대화는 고리타분하고 재미가 없다. 아,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 46:4).”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이 눈물겹게 감사하다. 비록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주의 속상하심이 느껴지는 것 같다(5). 점점 더 악한 세대라.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6-7).” 저마다의 신으로 이와 같은 복음의 말씀은 웃음으로나 듣고 만다.
이 시대에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마음에 두라(8).”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이다.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9).” 나는 이제 이를 붙든다. 주를 경외하며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10).” 주가 주의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데 안도한다.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11).” 그 모든 계획을 실행하신다. 그러니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내게 들으라 내가 나의 공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12-13).”
오늘 이 한 날이 왜 그처럼 소중한가 하면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마 24:40).” 우습지만 나는 한나절이나 철봉을 조립하면서 주의 인자하심을 묵상하였다. 오후께 아들이 못 이기는 척 철봉에 매달리는 것을 보며 기뻐하였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내가 지금 누리는 이 은혜가 억지춘향인 것 같았는데 그 안에서 감사와 감격이 스며나고 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주가 이끄심이 기적이었고 은총이었다. 종종 아이들 어렸을 적, 내가 함부로 하나님처럼 살려고 하였던 때를 기억하며 회개한다. 회개와 감사는 한짝이다. 후회가 밀려나는 것 같다가도 오늘에 감사가 함께 나온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이 내 것이기를 구한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사 63:7).” 어찌 아니 그럴 수 있겠나? 그리하여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시 33:18-19).”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감사를 알고 감격을 잃지 않으며 그 안에서 주를 더욱 바라는 일이었다. 그리고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5-26).” 나 몰라라 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시 33:20).” 그 증거가 감격이었고, 죄를 미워하는 만큼 죄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주의 사랑을 증거하고 하는 마음이었다. 이에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21).” 곧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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