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이사야 64:4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
우리는 의인이면서 악인이다. 죄에 사함을 받았으나 여전히 죄악을 저지른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이 땅은 막혀있다. 아주 가끔 찔끔거리듯 물방울이 떨어지는 하수구 같다. 흙과 온갖 더러운 찌꺼기로 막힌 것이다. 서로의 사랑이 그런 것 같다. 죽고 못 살 것 같지만 잘 나오다가도 수압이 모자라 골골거리는 수도꼭지 같다. 종종 그러해서도 천국을 꿈꾸지만 자칫 천국에 대한 환상이 우리를 멍들게 하는 것도 같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우리는 감히 그 사랑, 그 탁 트인 자유함을 상상도 못한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 24:16).” 주님과 함께 살면서도 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형국이다. 후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31).” 어쩌면 오늘 나의 날들이 그러한 것은 아닐까?
괜히 마음이 답답하고 몸은 어려운 하루였다. 기껏 수술 날짜를 잡고 시간표를 짰으면서 또 누구 말에 이럴까 저럴까 하는 아내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러게 이 사람 말 들으면 이렇고 저 사람 말 들으면 저런 것을, 앞서 여러 날 고심하다 결정한 것이 또 번복이 되는 것에 더는 입을 닫아버렸다. 아들은 괜히 어려워서 우리는 저 애가 중2에 머문 것 같다고 놀리다가 시들하였다. 뚱하니 말도 없고, 그래서 서로를 불편하게 하는 것인데 어쩌겠나? 내가 자꾸 안달을 부리듯 채근하고 말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아이는 엉뚱한 소리나 하고 더는 나아지는 게 없는 것 같으니 뭐 하나 시원하게 되는 일은 없는 것 같고, 이게 맞나?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 같은데. 몸은 장마철이라 변덕을 부리듯 좋았다 나빴다 온 몸에 파스를 덕지덕지 붙이고 말 그대로 아등바등 기를 써보지만. 마음은 어렵고 몸은 힘에 부치고 무슨 일에도 내 맘 같지가 않고… 나는 종일 말을 잃은 사람처럼 시무룩하였고 슬펐다. 아,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사 64:4).” 나는 주를 앙망할 수밖에 없다. 자식도 처도 일의 보람도 모두가 꽉 막힌 하수구 같다. 몇날 며칠 내리지 못한 오물이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더럽고 역겹다. 내 자신이 추하고 남루하기만 하다. 그러니 어쩐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 24:39).”
만져보고 알라.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다. 예수님의 음성에 눈물이 핑 돈다. 주가 함께 하심을 알겠는데 나는 왜 늘 눈이 가려지고 귀가 먹먹하여 제대로 듣지도 못하는 것일까? 마음은 저 혼자 어렵고 그러는 나를 가족들조차 이제는 그러려니 하면서, ‘아빠는 아프니까, 너희가 이해해.’ 하는 식이다. 아주 맑게 갠 날, 그 화창하고 청아하여 온 몸이 날아갈 듯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아픈 몸이 지겹고 여러 쓸데없는 생각들이 너무 무겁다. 염려가 나를 쥐어짜듯 진액을 다 뽑아내어 나는 건초더미처럼 푸석푸석하다. 이때 오늘 시인은 내게 속삭인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아,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9).” 언제쯤 주만 앙망함으로 이 모든 막힌 것들로부터 뻥 뚫릴 수 있을까? 그런 날이 내가 살아서 이 땅에서 누릴 수는 있는 것일까? 아내와 통화를 하다 그럼 맘대로 해! 하고 전화를 끊는데 옆에서 아픈 아이가 눈치를 본다. 괜히 쩔쩔매는 아이가 꼴 보기 싫어서 산책을 같이 하다 그만 돌려보냈다. 이래저래 나는 역량이 되지 못한다.
그런 심정인데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18).” 내가 막힌 게 아니라 세상이 다 온통 꽉 막힌 것이고, 그나마 졸졸 흐르듯 연명하고 사는 것도 주의 은혜라.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시 64:6).” 오늘 말씀이 그러한 나를 두고 말씀으로 채근하시는 것 같다. 죄악이 나를 몰아가나이다. 내 안의 두려움과 염려는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참고 견디기 힘들어서 안정제만 수시로 삼킬 뿐이니, 저녁이 되면 녹초가 되어 몸조차 가눌 여력이 없다. 아,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나의 이 모자라고 답답한 심정을 뉘 알아주리오. 주밖에 나의 맘을…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예수의 부활은 오늘의 나를 붙드신다. 부활은 그저 조금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나이다. 나이면서 더는 내가 아닌 나이다. 그렇게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15).” 주의 강림이 오늘도 내 안에, 이 하루에 새로이 임해야 한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16-17).” 이는 매주 은유적이면서 실제적인 말씀으로 읽힌다. 나중에 그리 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오늘도 다를 바 없이 주의 사랑을 맛보아 안다. 그런데 어쩌면 나는 너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들’로 시달리는 것 같다. 바울은 경고하였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너무 지나치면 나의 지나침으로 나를 망하게 하는 일이었으니,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우리에게 두신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너무 모든 일에 관여할 것 없다. 아들은 아들의 길을 가고 아내는 아내의 선택을 이행하면 된다. 저들이 다 내 말을 듣고 내 뜻대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아픈 아이와의 시간에서 늘 그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나는 번번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으로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 너무 의식하고 의존할 거 없다. 자식은 자식이고 아내는 아내일 뿐이다. 내가 저일 수 없고 저가 나이어서도 안 된다. 아이는 아이고 누구는 누구다. 저들에게 다만 나는 나의 길을 가며 주와 동행하는 삶으로 드려지고 보여지고 만져지면 된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성경은 그 한계를 명확히 한다.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고후 10:13).” 이를 알고 인정하고 산다는 게 때론 자존심 상하고 무시당하는 것 같아 모멸감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고전 12:18-19).” 서로 존중하고 내버려두는 것도 주께 받은 지혜일 것이다. 어쩌겠나? 나는 저로 살 수 없고 저가 나로 살아서도 안 된다. 개개의 충실함이 다를 뿐이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7).” 주가 맡기신 그릇이 다른 것이다. 나의 옹졸함은 아들 하나, 아내 한 사람 담아내기에도 부족할 따름이라.
묵묵히 그저 무던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4-5).” 각자 더하시는 날에 충실하고 충성하면 된다. 서로가 다르가 같은 것은 우리가 모두 한 하나님을 모시고 저와 인격적으로 관계하며 사는 것이 천국이고, 이 땅에서의 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2-13).” 서로 존중하고 냅두고 주께 맡김으로 자유할 수 있다. 이 모든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 다만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그렇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얼 어떻게 해줘야 하는 것은 아니어서 주께 맡김이라. 주만 바람이라. 그러느라 위선적이지 말 것!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 괜한 존중이 방기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나 몰라라 외면하고 놓아두는 일은 아니다. 우리는 어떠하든 가정예배를 드린다. 아들도 이는 수긍한다. 어떠해도 다 같이 둘러앉아 하루를 예배로 마무리한다. 그리 밴 우리 가정의 습관이 참으로 복되다. 억지로라도 한다. 때론 끝나고 또는 시작 전에 다투다가도 한다. 웃길 때도 있고 어색해서 죽을 맛일 때도 있다. 어제는 종일 나 혼자 뚱했다가 그렇게 예배로 하루를 마치려니까 송구하고 부끄럽고 민망하였다. 우리는 의인이나 여전히 죄인이다.
그러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사 64:7).” 우리 스스로는 어림도 없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6).”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럼에도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8).”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34:1).” 미친 척 하며 사는 세상에서도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2).”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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