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전봉석 2020. 7. 4. 06:15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예레미야 5:25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시편 41:12

 

 

상관하지 말라고 해서 상관하지 않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다. 남이라면 모를까, 남이라 해도 사람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니어서 서로 돌보고 위하고 더하도록 하셨는데 이는 본래 하나님의 성품과 모양에 따른 게 아닐까. ‘싫다는 데 그럴 게 뭐 있어?’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럼에도 계속 마음이 가는 경우가 있고, 이와 같은 데는 다 유효기간이 있는 듯도 하다. 정하신 바 그 때가 있어서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3:2-8).” 마치 좋으신 하나님은 계속, 무조건 좋아야 한다는 착각을 가질 때도 있다. 그 기다림도 때가 있다. 노아의 때처럼, 장구한 세월의 기다림 끝에 결국은 멸망이라.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이르는 것이었으니. 사람과 사람의 마음도 그러하여 무한하고 무궁하지는 않다.

 

주전 597년 유다나라는 결국 바벨론의 침공과 함께 1만여 명의 사람들이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포로로 끌려갔다. 일은 결국 그렇게 되었고 그것으로 끝장인 줄 알았는데, 이 모든 게 주의 뜻이라. 그의 계획하심 가운데서의 일이었다. 비록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29:11).” 이 한 구절의 말씀이 종일 나의 마음을 붙들고 소망을 더하셨다.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있다.’ 싫다 하고, 상관하지 말라 하고, 더는 바라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은 생각이 다 있으시었다. 그 생각의 보증은 하나님이시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하나님이 아시는 하나님의 생각이라! 전에 같으면 이 말이 와 닿지 않고 터무니없는,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인 하나님으로만 여겨졌을 텐데 이제는 내 의지나 나의 판단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이 있으시다는 게 참으로 귀하다. 새삼 안도한다. 다행한 일이다. 내가 뭘 하려하고, 할 수 있을 줄 알고, 한다고 할 때는 그러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생각이 싫기만 하였다. 가령 어릴 때 자주 듣던 말, ‘하나님이 뜻이 계셔서’, ‘하나님이 특별히 너를 더 사랑하셔서나에게 향한 주의 계획을 불편해하고 싫어했었다. 그 하나님은 세심하시었다. 꼼꼼하게 나보다 더 나를 챙기시고 위해주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9-30).” 그러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

 

이러한 말씀이 당장 망해서 포로로 끌려가는 처지에 귀에 들리겠나?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광대하시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10:29).” 그러므로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6:27-28).” 주께서 입히시고 먹이시고 오늘까지 키워주시고 자라게 하셨다. 내가 조바심 낼 일이 아니다. 나의 마음은 간사하고 옹졸하여 더는 마음이 기울지 않는 데 따른, 누구에게 놀랐다. 모처럼 저의 전화가 들어왔다. 이런저런 사연을 구구하게 늘어놓았다. 전에 같으면 간섭하듯 관여하고 묻고 그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을 텐데 통화하는 내내 무덤덤한 나의 마음이 되레 낯설게 여겨졌다. 저 또한 그냥 그렇다는 얘기로 별반 무덤덤하게 안부를 묻고 말이 오가다 어중간하게 통화가 끝났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란 그처럼 다 때가 있어서 더는 고이지 않고 기울지 않는 마음 앞에서는 나 또한 내 마음에 속수무책이라. 뭐라 더는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하셔서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9:13).” 주는 연거푸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말씀하고 계신다.

 

포로로 끌려가며 더는 희망도 없을 것 같으나 하나님의 이와 같은 마음을 끝까지 붙들고 있던 인물도 있었으니 다니엘과 그 친구들 같은 경우이다. 저들은 어떠하든 하루에 세 번 습관을 좇아 주께 기도하였다. 성경의 핵심은 그것이다. 곤고한 날에 주를 부르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7:14).” 도대체 그 하나님의 계획은 그럼 무엇일까?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29:11).” 우리에게 재앙을 주시는 게 아니라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미래와 희망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싫다는데도 그러하심은 아직 어려서 모르거나 미련하여 알지 못하는 일이었으니, 하나님은 오늘도 참고 기다리신다. 그러나 그의 기다림이 영원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곧 방주의 문이 닫힐 날이 오고 닫힌 후에는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따름이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25:30).” 이와 같은 말씀이 나는 두렵기도 하고 기다려지기도 한다.

 

작은 참새 한 마리가 후드득하고 날아가 나뭇가지에 앉았다. 너무 여리고 가는 가지였다. 휘청하고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걸어가다 우연히 그 광경을 지켜보는데, 참새는 시치미를 떼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뭇가지에 앉아 자유로웠다. 녀석의 비결은 날개였다. 금세 또 푸드득 하고 날아 다른 나뭇가지로 가서 앉는 것이다. 우리에 두시는 자유도 그러하였다. 요동치고 금방이라도 부러져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상황인데도 시미치 떼고 평안히 거할 수 있는 까닭은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61:1-3).”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의 말씀 앞에서 나는 행복하였다. 나의 날개는 주의 영이다. 주의 영을 내게 두셨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비록 보이는 나는 보잘것없고 한심하기 이를 데 없어, 다들 뭐라 좀 하려 하면 너나 잘해!’ 하는 식이어서 민망하기 이를 데 없으나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사는 삶으로,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6:7-10).” 지금의 내가 나로 전부가 아니고, 보이는 내가 보이지 않는 나보다 결코 더 크지 않았다. 나는 남루한 자 같으나 그 속의 평안이 자유를 향하였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4:6-7).” 어떠하든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아버지시라. 나로 그 멍에를 벗기어 자유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이와 같은 사실 앞에서 여러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참 위로를 얻는다. 누가 알아주리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2).” 해방과 자유를 얻기 위한 날들이 아니라 이미 얻은 자유와 해방을 회복하고 누리는 삶이어야 했다. 거기에는 순종과 사랑이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그런데 이 좋은 것, 좋으신 하나님을 자꾸 물리치려는 마음이 있었으니!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5:25).” 오늘과 같은 말씀 앞에서 나는 난감할 따름이다. 어찌할꼬? 그리 갸우뚱하며 두려워할 때,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41:12).” 주의 사랑과 인자하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 내 안에 이는, 우리 안에 두시는 어떤 마음,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6:13).” 이와 같은 소망을 더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 날마다 드려지는 마음으로,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41:1).” 주의 마음을 닮은 자로 사는 일,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