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전봉석 2020. 7. 5. 06:12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예레미야 6:14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42:5

 

 

아내는 아이들 시험으로 보충을 하고, 아들은 공부하고, 나는 딸애와 같이 산책을 하고 영화관에 갔다. 모두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 역력했다. 그 큰 극장 안에는 우리 둘 뿐이었고, 매표소에도 직원이 혼자 표를 내주거나 팝콘을 팔고 있었다. 아이들만 천방지축 뛰어다니고 사람들의 어깨는 축축 쳐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였으나 코로나19’ 전염병의 여파로 사회는 제구실을 못하고 있었다. 영화는 그 틈을 타 전염병을 소재로 한 좀비 영화였으나 과장되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먼 길을 걸어 돌아오는 내내 마음은 저 혼자 우울하고 불안하였다. ‘곤고한 날에 깊이 생각하라.’ 하는 성경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바라게 하는 것을 느꼈다. 고난 중에 만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비로소 우리가 성소에 들어갈 때,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73:21-23).” 걸으면서 걷는 동안의 성소인 셈이다.

 

이래저래 마음은 까부라지고 몸은 힘에 부쳐 말 수가 줄었다. 아이는 어디 면접을 보고 왔던 게 안 됐다며 문자를 하였고 실망이라 우울한가보았다. 이래저래 답이 없는 세월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러할 때 오늘 말씀은 거짓을 분별하게 하신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6:14).”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 하는 따위의 위로는 오히려 우리 영혼을 안이하게 할 따름이다. 하나님을 만나야만이 끝날 이야기다. 대책이 없어요, 아이엄마의 말에도 나는 그리 생각하였다. 나름 누구보다 잘 믿는다.’고 하나 자신을 미처 돌아보지 못하는 까닭은 현실에 눌려 함몰되어 그런 것은 아닐까? 장성한 아이 뒷바라지가 고단할 따름이다. 어떤 말을 미루는 까닭은 모르는 게 아니라 그 일, 하나님을 의뢰하는 일에 추상적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기도하죠, 성경보죠, 누구보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는 저의 고백 앞에 나는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러니 평안하다, 평강이다, 하고 말해줄 수 없어서. 스스로 '그만하면 됐다' 하고 여기는 데는 미움도 분노도 실망도 여전하여서 네 탓으로, 하나님 때문이다.

 

원망하는 마음이 저간에 깔려 우리는 남은 생이 암울하고, 암울하면 암울 할수록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시간만 축내고 있는 인생처럼 세월을 보낼 분이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말씀은 큰 소리로 외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42:5).” 오늘 시편의 말씀은 그렇게 다그쳐부르신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는 거짓된 평안도 문제지만 낙심으로 자신의 비천한 처지를 온당하게 여겨서 무뎌지는 것이 더 큰 문제다. 하나님은 다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징계가 아니다. 미래와 희망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29:11).” 그런데도 삶은 팍팍하고 마음은 푸석거려 풀풀 날리는 먼지 같아서, 서로가 뭐라 한들 그저 그러려니 하거나 어디 누구의 성공이나 소위 말해 대박쯤 나야 그것으로 주를 찬양하지, 저마다 이 지긋지긋하고 넌더리나는 일상의 반복적인 그 모양 그 타령에 대하여는 안이할 따름이다. 삶의 의미를 잃고 만족을 다하지 못하며 자유가 없는 것이고, 정체성 따위는 일찌감치 잃어버린지 오래다. 희망도 없고 정의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아이의 소식에 나까지 우울하였고, 딸애의 상화에 모처럼 찾은 영화관의 풍경은 더더욱 심란하기만 하였다. 단단히 골병이 든 세상이다. 전염병의 사회 확산은 초기 때보다 심각한 수준이라는 진단이 나오고 저만치 거리의 사람들이 온통 마스크를 쓰고 행렬하는 모양은 미래 사회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이 불안을 조성하였다. 그러할 때 우리의 바람은 간절하여서,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42:1).” 주를 찾는 것이었으니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2).” 오늘 날 우리는 예배를 박탈당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63:1).” 주를 앙망하고 앙모하는 마음은 잃었다. 친구는 그러려니 하고 되레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 는 소리로 주일을 예전처럼 늘어져 한 주간 피로를 푸는 정도로 여기게 되었다.

 

도로 교회와 멀어졌으면서도 대수롭지 않다. 누구는 교회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전염병과 관련해서 그들 나름의 안이한 모습에 실망하고 아예 교회를 등지기로 작정을 하였다. 벌써 교회를 나간 지 오래 됐다는 말을 아주 서슴지 않고 하면서도 '평안하다 평강하다' 말한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더는 아무 말도 못하게 한다. 누구는 늘 나의 이런 말에 지겨운지 연락도 피하고 옛 생활로 돌아갔다. 저들의 공통된 말은 다 그런 거지 뭐하는 식이라, 오히려 이러할 때 더욱 주를 바라고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는 나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리는가보았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2:17).” 예배가 없고 말씀을 멀리하면 더는 자신의 마음을 살필 이유도 동기도 사라진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5:1-2).”

 

예배 때 우리는 주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다. 소망을 잃으면 세상에서 세상처럼 사는 게 가장 큰 평안 같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5-6).” 모처럼 먼 길을 걸어서 그런가, 여러 번 걸음을 멈추고 나는 저마다의 사람들을 구경하였다. 얼굴을 가리고 말수가 현저히 줄어든 거리에서나 상점에서 사람들은 그럼에도 마지못해 살고 사느라 죽을 맛인지 그 속에 화가 가득하였다. 조금만 건드리면 두고 보라는 억하심정으로 짜증은 가득하고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시비가 붙었고, 연일 보복운전을 처벌하는 조항이 강화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이시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46:10).” 나는 무슨 일로 씨름하다가도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묵상하며 마음을 어르고 달랜다.

 

전에 글방에 오던 어린 소녀아이를 만났다. 이제는 중학생이 되었고, 키가 훌쩍 자라있었다. 여름이라 민소매바람이었는데 초딩 때 손목을 여러 번 그은 자국이 긁고 붉은 흉터로 선명하였다. 이를 숨기기는커녕 과시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화장을 짙게 하고 마스크를 폼 나게 쓰고 삼삼오오 내 옆을 스쳐갔다. 알아보았는지 눈인사를 하기는 하였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아이의 팔뚝에 눈이 먼저 갔고, 아이는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고 지나가버렸다. 잘 지내는지, 요즘은 좀 어떤지, 나랑 얘기 좀 할래,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럴 수 없었다.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33:31).” 그 안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이 아이를 굳이 교회로 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11:6).” 우리는 그러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형식적인 것들을 경계해야 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1:11).”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 나는 가끔 나의 안이함을 경계하기 위해서도 억지로라도 이처럼 글을 쓴다. 묵상하는 시간을 포기하지 않는다. 와 닿지도 않고 할 말도 없는데 말씀 앞에 앉는다. 그리고 습관처럼 주의 말씀을 기다린다. 몸을 굴복시킬 때 마음이 진정된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면 몸은 고단할 따름이다. 당장은 유익한 것 같으나 우리 사람은 본래 일관되지 못하고 성실하지 않다. 단지 전염병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다 우린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7:22-23).” 어제는 그렇게 모처럼 거리로 나갔다가 우리가 처한 상황의 실태를 목격하고 돌아온 셈이다. 곧 우리 마음에 없는 것, 잃어버린 것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29:13).” 그러니 내가 뭘, 나라도 뭘 어쩌면 좋을까?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42:6).”

 

그러할 때 오늘 말씀은 더욱 강하게 나를 붙드신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