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를 건지소서

전봉석 2020. 7. 6. 05:49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7:16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시편 43:1

 

 

신념은 자신의 의지가 분명한 것이고 믿음은 그 의지와 상관없이 붙들리는 일이다. 믿음은 불가항력적이고 신념은 의지적이다. 그때마다 주체가 다르다. 신념과 믿음은 전혀 다른 것이면서 같이 혼용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기 때문이다. 가령 모 교회 어느 부교역자의 일이다. 모처럼 오후께 전화를 주어 이런저런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신이 섬기는 교회는 이번 코로나19 사태에도 한 번도 공적인 예배를 쉰 적 없고 심지어 매일 저녁 9시 특별기도회를 가졌으며, 이는 담임 목사님의 남다른 지도력에 모든 성도들이 합심하여, 어떠어떠하였다는 말이 이어지는데 나는 듣다가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그래도 주의 은혜로 불미스러운 일이 없어 다행이었다. 나의 심보가 고약해서 그런지, 믿음이 별로여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그러한 강한 의지, 목사의 신념을 나는 훌륭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것이 자부심이 되고 은근히 내세울만한 자료가 되는 것에서 나는 더욱 말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저의 은근한 자부심인지, 상대적으로 나의 연약하고 비루한 심성은 내세울 게 없었다. 오늘 말씀에서, 사람의 무익함과 연약함에 대하여 묵상하게 되면서 저와의 모처럼 통화에서 위태롭게 여겨졌던 일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무엇을 하여 어떠하여진 게 기독교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죄인일 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그리하여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6-8).” 곧 경건하지 아니한 나를 경건하다 하시는 일이라,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4:5).” 우리가 입고 사는 은혜란 무엇을 어떻게 하여 이루어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늘 송구하고 면목이 없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2:8-9).” 그러해서 나는 우리가 우리의 열심을 다하는 일에 오히려 두려움을 느낀다. 안 믿는 것이야 어쩔 수 없으나 믿음을 신념화할 때 그 고집은 아집이 되기 십상이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2-23).” 나는 이 말씀이 가장 두렵다.

 

기껏 한다고 한 것이 내 목의 방울이어서야! 스스로 이를 확신하고 주장하는 것도 모자라 과시하는 경향이 우리 속에는 있으니 이를 경계해야 할 것 같다. 사람의 신념은 역사적으로도 그 잔혹성을 능가하였다. 가령 1915년 터키인들은 아르메니아인들을 집단 살상하였고, 독일은 유태인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였으며, 소련은 지옥 같은 강제수용소의 학살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살상이 이루어졌고, 모두는 자신들의 신념에 의한 강한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오늘 말씀도 이를 상기하게 하신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7:31).” 저들은 신념에 따라, 어린 자식들을 몰렉의 제단에 불태워 바쳤다. 힌놈은 불에 타 죽어가는 어린아이의 부르짖음, 절규를 의미한다.그러므로 보라 다시는 이 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죽임의 골짜기라 부르는 날이 이를 것이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9:6).”

 

우리 인간의 신념은 이처럼 끔찍하다. 이를 선이라 여기면 거기서부터는 함정이다. 믿음과 닮은 자기 의다.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7:32-33).” 그러므로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4).” 하는 말씀에는 나는 아찔하고 두려워진다. 한 사람, '우리 담임 목사님'의 확고한 신념이 혹시 완고함으로 교회를 주도하는 것은 아닐까? 저의 은근한 자부심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였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8).” 즉 우리의 신념으로 뭉쳐진 곳이 지옥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노하실 때에 그들을 풀무불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삼키시리니 불이 그들을 소멸하리로다(시 21:9)." 곧 "거기서 불이 너를 삼키며 칼이 너를 베기를 느치가 먹는 것 같이 하리라(나 3:15)."  그러므로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하는 말씀이 두렵다.

 

거짓과 진실을 분간하기 어렵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8:44).” 무엇이 옳은지 또는 그른지, 그것이 오늘을 결과적으로 반영하는 일이라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러해서 교인이 더 늘고 단합하여 굳건한 것이 우리 목사님의 카리스마때문이라는 표현에 나는 끙, 하고 뭐라 반박할 말을 잃었다. 하긴 추세가 그런 지도자, 저의 교회로 부흥케 하고 이를 기치로 내걸고 자랑스러워하는 성도의 무리가 교회를 더욱 번성되게 하고 있으니글쎄 모세의 지도력이었을까? 다윗의 탁월한 통치였을까? 저들의 위력이 그만한 가치와 존중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워낙에 저의 자랑(!)이 분명하여서 나는 그의 어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다만 말씀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7:16).” 구하여도 구한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43:1).” 나는 저의 말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고, 그래서 너는 어떠한가? 하고 묻는 것 같아서 몸 둘 바를 모를 뿐이었다.

 

나의 소박한(?) 믿음은 그저 하나님이 하셔야 하고,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밖에 달리 말할 게 없었으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8).” 그 깨끗함은 심령이 가난한 것이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하시는 말씀으로 이어져 말 그대로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고 드러나는 것도 없으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주의 나라에서 그의 위로밖에는, 그것도 주시는 이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뿐이었으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다만 주가 주신 이 날의 딛고 서는 일에 묵묵할 따름이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주의 말씀으로 배부를 것이고,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곁에 두시는 이로 생겨나는 마음이라,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이게 어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뭐라 나는 투철한 의지도 주장도 내세울 것이 없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주 안에 다만 거하는 것으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이다(5:3-10). 다만 내 안에 계시는 주가 크시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그래서 나는 이 모양인가? 어떤 가시적인 성과는커녕 주는 것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기소침한 마음이 저와의 통화 후에 밀려들었다. 그야말로 나 하나 바로 건사하는 일조차 버거워 쩔쩔매면서 누가 누구더러, 무슨 마음으로 이런저런 불편함을 느끼는가싶었다. 다만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 다만 이렇게 아침 일찍 말씀 앞에 앉아 나의 나 된 것에 송구함과 죄송함을 느낄 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3-4, 8).” 그러니 이 땅에서의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삶으로 주의 일을 선도하여 교회 부흥은 물론 사람들의 구원을 선도해야 하는 일이라면하필 나 같은 자를 잘못 세우신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시겠나? 그렇듯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19).”

 

행여 이와 같은 변론이 나의 나 됨에 따른 변명이 되지 않기를. 오직 은혜로, 주의 긍휼하심 가운데서 나는 다만 살뿐이라.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43:4).” 비록 아무 것도, 나의 믿는다고 믿는 믿음도 의심스러울 뿐이지 어디 감히 신념을 내세울 것도 못 되어서 민망하고 송구할 따름인데 그래서도 더욱 말씀 앞에 앉을 뿐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