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9:23-24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시편 45:6
보편적 진리는 없다. 우리의 구원과 영생은 제한적이고 이미 작정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졌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때론 우리의 이해가 미치지 못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으나 복음은 상식을 초월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곧 우리가 그 뜻을 앎으로 모든 이를 존중하고 위하여 구원의 대상으로 위하는 일이지, 만인구원설 따위의 논제가 아니다. 모든 형제와 화목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 그럼에도 오늘 말씀은 엄히 경고한다.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렘 9:4).”
사람은 선할 수 없다.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6).”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두려운 일은 이를 꾸짖고 징계하사 돌이키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는 동안 내버려두심인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24).” 그 추하고 악함이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가령 일련의 ‘n번방’ 사건에서 나는 저들의 생김과 그 모양을 보고 놀랐다. 뭔가 상상했던 음흉하고 추악한 모습이 아니라 너무도 순박하고 가련한 젊은이들이었으니. 이처럼 누가 그 사람 속을 알 수 있을까?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남이 두려운 게 아니라 내 자신이 두려워질 때도 있다. 내 속에 있는 더러움을 나는 주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곧 우리가 종종 위대한 착각에 시달리는 것은 스스로 택함 받았으니 타락하여 지옥에 갈 리 없다고 여기는, 신념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쇄기를 박는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잘 믿다 교회를 떠난 게 아니라 본래 저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었고 자신의 의지에 따른 신념이거나 아집이었다. 그럼에도 주의 사랑과 인내는 긍휼하셔서 돌이켜 주의 길로 올 수 있기를 여러 방면에서 열어두신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3-5).” 이는 우리로 저들 모두를 포기할 권리가 없음을 알게 한다. 내가 누굴 비난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다. 복음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다. 저로 어찌 하실지 모른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6).”
그래서 하나님은 저희가 악인이라도 저들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겔 18:23).”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엄히 강조하셨다.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9).” 곧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하사 택정하신 하나님의 자녀라면, 설령 그가 지금 아주 그릇된 길로 행하며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산다 해도, 나는 저를 사랑하고 주의 마음으로 대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종종 누구를 생각하다 저를 더는 상종하기 싫은데 자꾸 연관이 될 때 우리의 기도는 주의 마음을 바라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권능으로다.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진정성을 닮아간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 33:11).” 곧 우리가 아직 살아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었으니, 부디 내가 임의로 누구를 멀리하고 싫어하며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11:19-20).” 그렇다고 우리 하나님은 모두에게 무조건적인 은총을 부어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4).” 이 철저한 외면과 구제불능의 상태를 우리는 감당할 수 없다. 그 이유와 목적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칼빈의 ‘제한적인 속죄’ 교리를 주의하며 묵상하였다. 자칫 믿는다는 자의 교만이 될 수 있고-마치 자신의 어떤 특권처럼 생각하는, 그로 인하여 누구를 감히 판단하고 비판하여 정죄하게 되는 자리에 빠질 수도 있다. 하나님이 주지 않으셨고, 구원하지 않으실 영혼에 대하여는 뭐라 속단할 수 없다. 그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우리는 다 이해하고 알아들을 수 없다. 가령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하며 그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결국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하게 되는, 그리하실 수밖에 없는, 의인의 의인됨에 대하여 섣불리 정의할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나 같은 죄인이 무슨 수로 의인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겠나? 하물며 이제 와서 감히 누구를 속단하고 정죄하려 들겠는가?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 9:7-8).” 우리가 임의로 선택하고 그리 행한 일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느낀다.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게 하여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하게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7-8).” 이와 같이 어떨 때 어디에는 그렇고 어디에는 그렇지 않은 데 따른 것을 두고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공평을 운운할 수 있겠나?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5).” 이를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사 65:2-3).” 그가 나였다. 종종 아이와 있으면서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아 때로는 싫증이 또는 힘에 겨워 포기하고 싶은 마음만 간절할 때도 있는데, 그것까지도 그냥 내가 어찌 하려하지 않으려고 주께 아뢴다. 주께 맡긴다는 것은 그래놓고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이런 걸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은 것들도 ‘그냥’ 무던히 행하는 일이다. 이는 그 일을 오늘 내게 맡기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믿고 순종하려는 자세다. 그리하지 않으면 아이를 나는 사랑할 수 없다. 싫증과 환멸이 목을 조여오기도 한다. 오직 주만 바라는 마음을 구한다.
그리하여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상대적으로 그럴 수 없는 자들에 대하여는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구하고 또 바랄 수밖에 없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고로 나의 하루하루가 헛되지 않을 것을.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시 4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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