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예레미야 10:2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편 46:10
나의 단조로운 날들이 복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말씀에서 하루를 열게 하심이 귀하다. 특히 나의 책읽기가 한 날의 전부라 할 수 있어서 누구를 만나는 일도, 어디를 가야 하는 일도, 특히 무엇에 대한 관심도 모두 부수적인 일이 되었다. 한참 문학을 좇고 사람들과 어울려 무엇을 배우고 같이 돈벌이 밥벌이에 시달려야 할 때는 몰랐다. 그와 같은 여러 길이 오히려 그릇된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이방 사람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렘 10:2).” 그것이 주는 가치관은 스스로 교만하여지는 것뿐이었다. 의문에 의문을 더하고 의미에 의미를 더해 마치 자신의 이해를 충족시키려 할 때, 그와 같은 ‘여러 나라의 길’은 헛된 수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성경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어떻게 그러고만 사나 싶은데, 요즘 읽는 칼빈의 <경건의 비밀>과 존번연의 <경외함의 진수>는 나를 풍요롭게 한다.
특히 주를 경외한다는 것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막연한 이해의 한계에 묶여 있었는가 하는 것을, 나는 저의 논리와 성경을 제시하며 음미하는 방식에서 주께 이해를 구한다. 더 알기 원하는 욕심이 나는 것이다. 어김없이 오전에 아이가 오고, 저를 상대하는 일이 성가실 때도 있지만 특히 이번 주간은 새로운 놀라움에 놀라고 있다! 성경을 외우게 하였는데 그냥 그러다 말 줄 알았던 아이에게서 그 안에 거하시는 주의 영을 느낀다. 손으로 수십 번은 넘겨쓰고, 그래서 말로 하는 것보다 손으로 쓰겠다고 하여 시편 23편과 1편을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을 외우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그게 된다. 하려고 하는 그 안의 의지에 놀라고 공책 여러 장을 같은 내용으로 쓰고 또 쓰고 하면서, 저기 성경들은 내가 어릴 때 암송한 것을 여전히 외우고 있는 것이어서 새삼스러웠다.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게 아닐까?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7).” 이를 음미하는 데 있어 아이의 열심도 나를 독려하는 듯하였다.
단지 두렵고 무서운 게 경외가 아니다.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전 12:3).” 이는 공포다.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벧전 2:17).” 이는 위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이는 엄위다. 경외에 대해, 어떻게 두려워해야 할지, 그 두려움은 무엇인지? 나는 저의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성경구절을 일일이 적어 노트에 옮겼다. 먼저 그 두려움은 ‘하나님 그 자신’이다. 막연한 대상도 모호한 추상도 아닌 실제 그 자체로서의 대상이다. 저는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하고 외삼촌 라반에게 설명하던 그 대상, ‘이삭이 경외하는 이’시다(창 31:42).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53).” 그 앞에 서는 일이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렇다는 데 합류하는 일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자신과 관련되신 이, 곁의 누구, 그 이상의 존재인 것을 말한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 1:5).” 내가 사는 이 땅에서의 저 하늘, “북쪽에서는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욥 37:22).” 내가 서 있는 방위 안에서 느끼며,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족들과 민장들과 남은 백성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느 4:14).” 실전 가운데 계시고,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9:32).” 오늘 나와 함께 하는 ‘우리’의 그 존재이시다. 이를 감당하고 체험하는 날들,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나 1:5-6).” 이를 예민하게 느끼고 받으며 누리고 사는 일,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사 8:13).” 이를 아는 일이 복되었다.
성경 암송에 그처럼 성실할 줄이야. 아이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내 눈 앞에 하나님의 위엄을 두었다.’ 아이와 함께 하는, 하나님이 여기 계신데 나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때로는 성가셔하고 굳이 여기까지 와서 하는 것도 없는 것 같아 서로가 소모적인 시간이라고 속단하였던 마음을 회개하였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창 28:16-17).”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었다. 저 아이는 도대체 왜 그처럼 오는가, 하고 되물었던, 이곳이여!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다. 아들이 오고부터 아침 일찍 교회로 간다. 어제는 여섯 시 반에 문을 열고 창을 열고 커피를 내리고 찬양을 틀고 묵상 글을 읽으면서, ‘참 좋다’ 하는 감격에 젖기도 하였다. 그러니 이와 같은 말씀 한 구절이 모두 하나님의 임재라. 이는 참 설레면서 두렵고, 두려우면서도 자랑스럽고,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어려운 마음의 자리다. 단순하게 내가 유명한 누구를 만난다고 할 때 그런 자리에서의 불편하면서도 영광스러운 느낌 같다. 사람도 그러한데 천사는 또 오죽할까? “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단 10:11).”
다정하게 찾아온다 해도 저의 존재 자체로 영광인 일이어서, 종종 누가 팬이라면서 연예인을 만나다 울먹거리고 몸을 뒤로 빼는 일을 상상해본다. “인자와 같은 이가 있어 내 입술을 만진지라 내가 곧 입을 열어 내 앞에 서 있는 자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주여 이 환상으로 말미암아 근심이 내게 더하므로 내가 힘이 없어졌나이다 내 몸에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사오니 내 주의 이 종이 어찌 능히 내 주와 더불어 말씀할 수 있으리이까 하니(16-17).” 이는 매우 두렵고 설레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는 주의 임재를 구하고 바라지만 정작 저가 이곳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셈이다. 가령 나는 아이가 설마 시편 23편을 다 외울까? 하고 미더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말로는 자꾸 헷갈리니까 손으로 수십 번을 써서, 종이에 안 보고 쓰겠다고 할 때에 경탄하였다. 그러기 위해 혼자 있는 집에서 아이가 호흡을 가다듬고 여러 번 반복해서 써보았을, 저의 노트가 나는 경이로웠던 것이다. 그저 아픈 아이, 대책이 안서는 아이쯤으로 치부하고 있던 나의 마음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하려고 하니 또 하게 된다!
어릴 때 소경 된 어느 장로님들 그룹을 만난 적이 있다. 저들은 나병의 하나로 갑자기 시력을 잃은 이들이었다. 눈을 보지 못하면서 비로소 말씀을 보게 된 것인데, 녹음하여 들려주는 성경을 듣고 또 듣고 하여 성경 66권을 몽땅 외우고 다니는 이들이었다. 저들의 일과는 중보기도와 성경 암송이었다. 그저 딱하게 여겨지면서도, 내게 어디 몇 구절을 찾아 읽어보라 하여 읽다 틀리면 다정하게 바로잡아주던 나는 누구 소경 장로님과의 인연을 귀하게 여긴다. 문득 아이의 써 갈긴 여러 장의 노트와 그러하였을 시간을 경외하였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위엄을 나는 아이가 쓴 공책을 보고 느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누구는 할 일 없어 그러한가하여 쯧쯧, 혀를 찰 노릇이겠으나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욥 13:21-22).” 이를 느끼고 알게 하시는 이가 주의 손길이라.
‘하나님의 임재가 두려운 것은 나의 추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를 보고 저의 ‘노답’인 일상을 답답하게만 여겼던, 그리하여 무시하고 깔보던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단 10:8).”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복이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비로소 나의 추함에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주의 임재로 주의 선하심이 여실히 드러나고 이를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이가 천재는 아니다. 흔히 그런 아이의 경우 탁월한 어떤, 재능의 하나가 아니었다. 여섯 구절의 시편 23편을 외우는데 있어 예순 번은 넘게 쓰고 또 쓰고 하였던 저 아이의 공책을 보면 경이로운 까닭이다. 하고자 하는 그와 같은 마음을 주신 이가 누구이겠나?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호 3:5).” 결국은 그와 같은 마음을 주셔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렘 5:22).”
이를 듣고 느끼고 알 수 있는 것을 주시는 이가 더하셔야 하는 은총이었다. 같은 모래톱에서도 누가 느끼는 것과 누가 느끼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오전에는 아이와의 이러한 시간을 통해, 오후에는 존번연의 <경외함의 진수>를 읽으면서 또한 나에게 허락하시는 이와 같은 마음으로 감사한다. 곧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곧 “여호와여 주와 같은 이 없나이다 주는 크시니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말미암아 크시니이다(렘 10:6).” 그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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