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예레미야 21:8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편 57:7
우리 안에 화가 있다. 분하고 억울한 것이다. 누구 때문이다.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가 저의 탓이다. 다들 괜찮은 척, 가면을 쓰고 살지만 ‘많이 힘들지?’ 하는 말에 무너진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쉼을 얻지 못하는 시절이다. 저마다 살 궁리에 열심을 다하지만 그게 다 ‘너 때문이다.’ 이는 누구에 대한 말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러할 때에 말씀뿐이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어찌 해야 주의 멍에를 멜까? 어떻게 하는 것이 쉼을 얻는 길일까? 오늘 말씀은 직설적으로 암시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렘 21:8).” 선택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하는 고백이 드려져야 하는데 이것이 또 녹록하지만은 않다. 가장 쉬울 것 같은데 가장 어려운 까닭은, 결국 그 화는 ‘너 때문이야!’가 아니라 ‘나 때문이다.’ 자신 때문인 것이다. 처음 사람 아담이 느꼈을 그 암담함에 대해 생각해본다. 저가 그때 나무 그늘에 숨어 슬피 울며 ‘여자 때문에…’ 하고 이를 갈기보다 주 앞에 엎드려 자신을 통회하였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우리에게는 본래부터 우리 스스로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는 기름부음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지 않을까?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곧 하나님도 이를 알고 계셨고 이 일은 결국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획에 따른 일이었다. 어째서 우리를 창조하시기도 전에 그리 하실 수밖에 없었는가는 속 시원하게 알 수는 없으나 “그 기쁘신 뜻대로”는 분명하다.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5-6).” 그렇다면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일은 무얼까?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 먼저는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의미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그 증거는 이런 묵상과 이런 마음의 갈급함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그런데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피조물인 사람이 본연의 의지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야 한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2-23).”
그렇다면 그 증거는 무엇으로 삼아야 할까?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지만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게 된다.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요일 2:21).” 본능적으로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1:1).” 그 확신은 참과 거짓을 알게 한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27).” 나도 몰랐는데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6).” 그러다보니 더욱 더 말씀 안에 거하기를 바란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2:24).” 그리고 더욱 말씀에 유념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그리고 뻔뻔할 정도로 당당해진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다를 바 없는 죄인이면 더는 그 죄책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일이다. 이로써 서로의 사귐이 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1:3).”
이는 어떤 사람을 믿고, 교단과 교리를 신봉해서가 아니라 주의 말씀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2:25).” 그러므로 점점 더 의연해져간다.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29).” 어디가 아프면 아픈 대로, 누가 무시하면 무시당하는 대로,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 세상에 큰 미련이 없다. 사람에 대해 큰 기대도 없다. 심지어 자신에 대해 뭐 그리 바라는 것도 없다. 오늘 하루 또 이렇게 앉아 허리를 펴고 천근만근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움직일 수 있는 행동반경으로 족하다. 이는 그저 막연하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사는 까닭이 아니다. 그렇게는 못 산다. 내 안에 힘이 생긴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의연함은 그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 84:5-7).” 그래서 신기한 경험은 고통스러운데 괜찮다. 힘든데 그게 나쁘지 않다. 슬픈데 또 아무렇지도 않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 4:10).” 그러므로 어떠해도 주를 의지할 수 있다. 그게 된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35).” 저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저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술 더 떠서, 쓸모없는 나 자신이지만 이대로 드려지기를 바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나는 이처럼 말씀들 한 구절 한 구절을 따라가며 그 의미에 감복하는 일이 즐겁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화와 서글픔과 서러움과 어떤 자격지심이 나를 짓누르다 툭하면 치고 올라와 너 때문이고, 다 나 때문인 것 같아 궁지로 몰려가기 일쑤지만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행 11:17-18).” 우리에게는 회개를 주셨다. 주님, 하고 입을 삐쭉거리며 차마 말로 다 고백하지 못하는 심정으로 주 앞에 앉으면 ‘힘들지?’ 하고 토닥이시는 부드러운 손길이 들리는 것 같다. 이는 내가 시작할 때 가진 확신이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이를 견고하게 붙들고 있을 수 있는 그 일 자체가 복이다. 영원한 언약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렘 32:40).”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말씀으로 앉는다.
바람이 몹시 불어 아파트 창밖 저 아래 나무들이 요동을 치는 소리가 마치 물결치는 바닷가에 와 있는듯하다. 바람이 임의로 불되…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그러니 내가 나를 다 알려고 하는 것 자체도 어불성설이다. 다만 말씀 앞에서라. 두렵고 떨림으로 “내가 너희 행위대로 너희를 벌할 것이요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모든 주위를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1:14).” 이를 알 때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8).” 시인은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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