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예레미야 23:23-24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
시편 59:16
아이가 성경 한 구절씩을 암송한다. 병적으로 산만한 말로는 어려워서 손으로 쓰고 쓴 것을 두고 읊조린다. 그리고 한나절이 지나기 전에 암기하였던 것이 기억에 없다. 이러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런 생각까지도 주께 내어드린다. 그냥, 할 뿐이다. 아이와 같이 순서에 따라 이사야 59장을 읽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1-2).” 마침 그 직전에 읽으며 묵상하였던 내용의 말씀이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이를 깨달아 아는 일에 대하여, 오늘 아침 말씀으로도 이어지는 것 같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예레미야를 통해 물으시는 것 같다(23:23-24).
하나님이 능이 없어 아이를 저 지경으로 놓아두고 나의 형편과 사정을 이 지경인데도 모르는 체 하시는가? 우리 ‘하나님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대해, 하나님은 그 어떤 넓이보다 넓고 길이보다 길고 높이보다 높으며 깊이보다 깊으시다. 이를 존 번연의 책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기독교문사)을 읽으면서 더욱 그 이해와 묵상이 넓어지고 길어지고 높아지고 길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말씀에서 말씀으로 하루의 시간은 그 나열되는 일들 가운데서도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것 같았다. 아이의 맥락 없고 대책 없는 상황에서, 나의 이런저런 마음의 어지러움과 몸의 고달픔에서, 내가 그저 묵묵히 감당하고 수행할 수 있는 길은, 그 배후의 주님을 신뢰하는 것뿐이다. 달리 다른 무엇을 붙들고 살까? 어떤 기대나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으로는 모자라다. 단적인 예로 아이는 비행기 접는 것을 2년째 헷갈려하며 여전히 혼자서는 접지 못한다. 그런 아이에게 별의 별 걸 다 해보다, 성경을 한 구절씩 적어주고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같이 쓰고 또 써서 손에 익히게 하였다. 머리로도 입으로도 어려우면 몸으로 익히며 살다보면 그것으로 충만한 것을! 것도 아이가 안 하면 모를까, 그래도 감사하게 ‘깜지’를 쓰듯 여러 번 되풀이해서 쓰고 또 쓰며 순종한다. 어제는 완벽하게(!) 두 구절을 암기하여 써서, 마침 딸애와 같이 데리고 나가서 점심을 근사하게(?) 사주었다. 그것으로 감사하고 충분하였다.
자 그럼, 먼저는 <주의 사랑의 넓이>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11-12).” 거기가 어디까지든 우리의 죄가 아무리 넓게 퍼졌다 해도, 하여 우리의 죄는 문둥병처럼 우리를 몸을 넓게 잠식하였다 해도, “그러나 제사장이 진찰하여 거기 흰 털이 없고 피부보다 얕지 아니하고 빛이 엷으면 제사장은 그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레 13:21).” 그것은 번번이 재발하여 곁의 것들을 모두 잠식시키며 넓어지고 있다 해도 “그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가죽으로 만든 모든 것에 색점이 여전히 보이면 재발하는 것이니 너는 그 색점 있는 것을 불사를지니라(57).” 그리하여 우리의 선으로는 도저히 그 부끄러움을 가릴 길 없어,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6:8).”
그러할 때 다윗과 같이 우리는 울부짖는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시 37:35-36).” 다들 악이 더 잘 되고 무성하여 영광을 다 차지하는 것 같이 번져가는데, 그렇듯 넓게 드리워져 가는 이 땅의 죄의 넓이 가운데서 우리는 속수무책이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 모든 죄를 덮고 허물과 죄악을 사하신다. 곧 나의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32:1).”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만이 우리의 죄를 가려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고, 늘 송구하고 죄송할 따름이어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4-8).” 거주 주신 바 된 이 은혜에 나는 도무지 할 말이 없는 죄인일 뿐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자기백성에 대한 사랑이 무궁하여 나의 죄보다 더 넓게 펴신 구원의 팔로 나를 감싸 안으신다. 그렇게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사 65:1-3).” 이와 같은 은혜는 우리가 아무리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그 길이를 더 하고 더 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져 가늠할 길조차 없다 해도,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 22:1).” 기어이 우리로 주의 이름 앞에 신음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복을 다 잃어버린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을 때,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애 3:17-18).”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는 나의 멀어진 마음보다 더 길고 더 길어서 너끈히 와 닿아 나를 붙드신다.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사 50:2).” 곧 우리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의 팔은 아무리 죄로 멀리 떨어진 길 위에 놓여있다 해도 그보다 더 가까이 와 닿고도 남음이 있는 길이이다. 그것이 어제 아이와 같이 읽은 성경의 첫 구절이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59:1).” 이는 곧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신 30:4).” 즉 거기가 어디라 해도, 너무 멀리 떨어져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길이 만큼 거리가 벌어져 더는 가망이 없는 것 같다 해도,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느 1:9).” 더는 실망과 낙심의 자리에서 떠날 수 없이 너무 멀리 와 있는 것 같다 해도, 하나님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신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9-10).”
아, 우리 하나님의 구원의 팔이여!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나를 붙드소서!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사 59:9-10).” 말씀에 밑줄을 긋고 여러 번 묵상하는 일만으로도 이미 충만하였다.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는 또한 우리의 우울과 좌절과 낙심의 나락보다 깊고 더 깊으시다. 어느 학자의 말처럼 우리 사회는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것보다 정신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고 했다. 이제는 다들 정신과 치료가 다반사다. 상담은 필수가 되었고 저마다의 상심한 마음은 주체할 길이 없이 더 깊이 더 까마득한 깊이까지 곤두박질치며 떨어진다. 이를 심지어 무덤 같다고 시인은 고백하였다.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시 88:4-5).”
이와 같은 절망과 우울의 나락이 그 깊이를 더하여 그 어둠은 우리 영혼을 짓누른다. “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69:2).” 끝도 없는 수렁에 빠진 것 같고, 큰 물결에 휩쓸려 삼킨 바 된 것 같다.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 물이 나를 휩쓸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가 내 위에 덮쳐 그것의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14-15).” 종종 아이보다 아이엄마의 우울증이, 나는 그게 더 깊어 보여 안타까운데 저는 괜찮다고만 하니! 결국 우리가 의지할 것은 정신과 치료도 상담도 아닌 주의 깊고 놀라운 은혜의 섭리이다. 그 하나님이 나의 처소가 되신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신 33:27).” 음부가 깊으나 우리가 어찌 그 깊이를 알겠나?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욥 11:8).” 그러나 그 아무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고 떨어뜨릴 수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이를 누가 알겠나?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우리의 낙심보다 깊고 우리의 우울과 좌절의 자리보다 더 깊으신 주의 은혜의 섭리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건지시는 일이었으니, 불순종으로 까마득한 물고기 뱃속에까지 내려간 요나의 경우도 그러하고, 결국은 나를 지옥에서 건지심이다.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시 8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는 가늠할 수조차 없다. 아무리 우리의 교만이 높아서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인생 뭐 있어?' 하며 허풍을 떨듯 살며 또 하늘을 찌를 것처럼 그 죄가 높다 해도, 그리하여 나를 대적하는 것들이 하늘까지 성곽을 쌓았다 해도,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신 1:28-29).”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더 높고 그 높음이 더 높으시다.
“그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원히 지키고 그와 맺은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시 89:28-29).” 그 높고 높은 하늘에서 오신 이가 오늘도 만유 위에 계시고 내 마음에 계신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요 3:31-32).” 그곳까지, 내 음부보다 깊은 죄악된 마음보다 깊이! 넓게 퍼져서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죄의 범위보다 넓이! 더는 가망이 없어 돌아설 것 같지 않은 먼 길 위에서의 그 멀어진 마음보다 길게! 그리고 까마득하니 닿을 수 없는 교만의 넢이보다 높이! 구원의 사닥다리가 닿았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창 28:12).” 그처럼 나를 지키시며 돌보신다.
이에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시 59:16).” 오늘 시편의 찬송이 귀하게 울려 퍼진다. 나의 환난 날에 주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는 나의 피난처가 되신다. 그러므로 “나의 힘이시여 내가 주께 찬송하오리니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며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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