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
예레미야 25:5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시편 61:4
사는 동안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화롭게 하는 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두려움이란 나의 부족함이 연거푸 이는 일이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1:5).” 그러니 내 안의 어둠을 감출 길 없어 송구하고 답답한 심정이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 어두움을 느끼면 느낄수록 빛을 더 많이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묵상하면 할수록 그 무궁하심 앞에 송구하면서도 바란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알면 알수록 더욱 그 사랑을 갈구하게 되면서,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그분의 넓은 품에 감기고, 그분의 사랑이 미치지 못할 길이는 없으며, 세상 풍토가 아무리 악하여 끝 모르고 높아진다 해도 ‘하늘 아래 뫼이로다.’ 죄악이 깊어 우울과 좌절의 나락이 까마득하니 깊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지 못할 깊이는 없다. 이와 같은 묵상은 좌절이 오다 물러가고 근심이 쌓이다 무너지며 염려가 널리 퍼지다 흩어지게 한다.
장맛비가 요란하게 퍼부어대는 날이었다. 미안하지만 아이를 남은 주간은 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놓고는 마음이 쓰여 자주 연락을 해보고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나의 마음이 어찌 내 것이겠나? 주가 하시는 일이다. 공부방 아이가 그만 두는가 했더니 또 새로운 애를 붙이신다. 아내도 나이가 있으니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겠나, 하여 올 여름부터는 요양사자격증을 공부하러 다닌다. 건강을 더하시고, 아이를 보내시고, 그처럼 순탄하게 새로운 길을 열어가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주가 먹이시고 입히시는 까닭은 이 길을 가게 하신 이가 그리 책임지시는 거였다. 어떠해도 우리의 노력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6:8).” 주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덮으시고 주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 일이다. 내 부끄러움이 아무리 넓고 높고 길고 깊다 해도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넓으시고 길고 높고 깊으시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사는 게 지옥 같다면 지옥까지도 하나님은 내려오신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오늘 우리 가정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갈 때 이를 세우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은 종종 나의 근심 중에 되물으신다.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렘 23:23).” 아무리 멀고 멀리 떨어져 그 길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해도 하나님은 거기에도 앞서 계신다.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이 우리가 가장 잘하고 있는 게 두어 가지 있다면 하나는 이와 같이 묵상하는 시간을 사모하는 일이다. 아침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더 일찍 일어나서라도 이 시간을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게 한다. 다른 하나는 저녁에 가족들과 가정 제단을 쌓는 일인데 애들이 무슨 용무가 있어 출타를 하거나 빠져도 우리끼리라도 그 시간을 지킨다. 이는 오래 된 습관 같아서 그때 나도 어떻게 그리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이내 고꾸라져 두 손 들고 왔을 때 덮어놓고 시작하게 된 것이 가정예배다. 그땐 아이들이 한참 중2, 고2여서 학원 끝나고 오면 열두 시를 넘길 때도 있었는데 그래도 기다렸다가 같이 둘러앉아 그리하였다. 아니면 살 수가 없어서! 그게 아니면 죽을 것만 같아서! 가타부타 다른 이유도 어떤 여지도 없이 시작된 것으로 어느새 십여 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여전히 계속 그리하게 하신다. 말 그대로, 하게 하신다. 이와 같은 것이 섭리다. 우리로서는 알 수 없고 이해가 안 되는 높이나 넓이의 영력이다. 그러니 종종 나는 누구에게도 권한다. 처음만 어렵지, 무작정 그렇듯 모여앉아 성경을 무릎에 얹으면 주가 행하신다. 우리가 하는 게 아니다. 친구에게 그리 권하고 또 권하였다. 그냥 같이 성경 한 장 읽고 처음엔 네가 기도하고,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주를 인정하는 것이고 경외하는 일이다! 요란하고 거창한 게 아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그런데도 늘 알았다고 하고는 나중에 물으면 피식, 웃으면서 나중에, 하고 넘기고 만다. 특히 요즘 코로나사태로 도로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뭘 어찌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내 안에 두시는 안타까움은 주의 것이라. 나는 그것을 바탕으로 주께 빈다. 성경은 우리로 깨닫게 하신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늘 묵직하게 가슴에 돌 하나를 얹어 놓은 것처럼 숨 쉬기가 답답하여, 엑스레이도 찍어보고 심전도 검사도 하고, 피 검사, 초음파 검사를 다 해보았으나 결국은 신경정신과 쪽의 문제 같다며, 그렇게 약 처방을 받기도 하였지만 소용이 없다. 그래서 나의 불안과 초조를 없애달라고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는 그것이 나에게 유익한 것인가 보다! 그것으로 나는 아이를 생각하고 누구를 생각하고 저들을 두고 기도한다. 늘 또 같은 소리 하는 사람처럼 취급당하면서도 나는 이제 친구와 통화하거나 누구의 어려움 앞에서 답은 늘 일관되다. 주께 맡기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아니면 별 수 있나? 미덥지 않아 자기가 나서서 해야 한다고 하면 그만큼은 힘에 겨워 쩔쩔매며 사는 수밖에. 간단하고 쉬운 것부터 하나씩… 성경 한 구절, 그 한 장 묵상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럴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럴 여유가 없는 것이고 그만큼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에게 주신 오늘의 이 습관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가? 하려고만 하면 하려는 그 자체로 이미 시작하게 하시는 일이었으니, 못 하게 하는 것들을 밟아버리신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롬 16:20).” 주의 사랑을 확인하는 처음 것은 지금, 여기서, 당장 그리 행하는 것이었다. 누구와 통화하다보면 종종 듣는 소리가 ‘이번 일만 끝나면’ 하는 소리다. 그 친구 인생은 평생 그처럼 바빴다. 주일은 저에게 그 피로를 푸는 날이어서 바쁘다. 그런 거 보면 우리가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다만 시늉만 낼 뿐이다. 그리 행하고자 할 때 이미 주가 함께 하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고전 16:23-24).”
아이는 혼자 있는 시간이 불안하여 진정이 안 되는 것인데, 그렇다고 내가 저 아이를 붙들어둘 수도 없고 일일이 관여하여 뭘 어찌 할 수도 없다. 아는 누가 어디 강원도 쪽에 정착촌 비슷하게 노년의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아픈 영혼들’의 치유 마을을 개간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곳을 좀 알아볼까 하는 생각이 어제는 부쩍 강하게 들었다. 그처럼 나설 일도 아닌 것 같고, 그러니 같은 식구들도 지쳐서는 ‘진정제 먹고 자!’ 하는 게 저들의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니까. 아,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갈 6:18).” 내가 판단하기는 저 아이의 일은 저들 가족을 부르심이다. 부모가 별거중인 것도, 서로의 반목과 상처로 서로에게 찌르기만 하는 것도, 결국 ‘아픈 아이’로 인해 그나마 연락을 하고 안부를 묻고 서로들 끊어져나가지 않는 것일 텐데… 자신들이 어찌 맡으려고 하니, 아이도 안다. 스스로 표현하기를 ‘짐짝 취급한다.’고 하니, 나는 이 아침 말씀을 그리 다시 읽는다.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렘 25:5).” 악을 버려야 하고 돌아서야 한다. 아이를 봐서라도 그리 들려야 한다. 그러니 그걸 저들도 안다. 알면서도 아이엄마는 미루고 형아이는 외면하고 아이아빠는 따로 산다. 저들에게 아이는 그저 짐짝이다. 어제 쓴 아이의 일기 표현에서 나는 스스로를 그리 인식하고 있는 것에 가슴이 아팠다. 그러니 이처럼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에서,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시 61:4).” 나는 더욱 주의 날개 아래에 피한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살후 1:11-12).” 부디 나에게 들리는 것이 저들에게도 보이기를.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후 4: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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