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전봉석 2020. 7. 30. 06:08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예레미야 31:3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편 67:5-7

 

 

유난히 장마가 긴 여름이다. ‘코로나19’로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안 다니는 것도 아니고, 애매한 상태로 비 오는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머쓱하여 안부를 묻는 것도 눈치를 보게 된다. 사는 게 일이 되었다. 나의 하루는, 아침 일찍 시작하여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말이 줄고 만나는 사람은 제한적이 되었고 새삼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은 조심스럽다. 요즘은 자주 드는 생각이 오직 주 앞에서의 나. 점점 더 나이가 든다는 일은 그러한 시간에 대한 준비일 것이다. 그러할 때 나의 가장 귀한 복은 말씀을 곁에 두고 사는 것이 아닐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주어진 생의 의미는 놀랍게 드러난다. 단지 이 땅에서의 삶으로 족한 것이라면 어떠하든 추구하는 생이 만족함을 누리는 것일 텐데이는 잠깐이고 더하시는 세월은 영원하였다. 영원, 우리의 지식과 상상으로는 미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 대하여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3:18-19).”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우리의 생에 충만할 수 있기를.

 

무릇 그 되는 것이 멀고도 깊다. “이미 있는 것은 멀고 또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7:24).” 도무지 미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내 안에 이는 확신은 종종 나 자신조차 당황스럽게 한다.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세계를 마치 다 아는 사람처럼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하시는 일이었으니우리 안의 믿음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없는 것 같다. 정말이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내남없이 꾸역꾸역 살아가는 듯한, 한 날 한 날의 생이 버겁게만 느껴지는데.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2-3).” 즉 무엇을 아는 것은 모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으나, 하나님을 앎으로 모든 것을 아는 게 된다. 더는 알 수 없는 세계가 잘 안다고 여기는 세계보다 월등히 많다 해도,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3:12).” 우리 모두에게는 그 때가 올 것이다.

 

가끔씩 건물과 건물 사이를 지날 때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을 본다. 요즘은 여자아이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담배를 피운다. 다리나 팔뚝에는 온갖 문신들이 현란하다. 다들 사는 게 지겨운 표정으로 침을 뱉는다. 서로 주고받는 말에는 욕지거리가 대부분이다. 슬그머니 그 앞을 지나면서 나는 종종 무슨 생각을 할까? 오늘 본문에서 표현되고 있는 그 때에를 상상해본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31:13).” 서로들 울분이 가득한 것 같다. 말끝마다 씨발 씨발하며 말을 이어간다. 그 내용은 어떠하든 연신 뱉어대는 침과 뿜어대는 담배연기와 쏟아내는 말들로 세상은 혼탁할 따름이다. 불안한 미래가 우리의 현실을 잠식해버린 것이다. 그나마 부모의 통제 아래 있는 아이들만 공부방으로 오는데 열에 아홉은 사는 이유도 방향도 모른다. 늘어져 게임을 하고 멋대로 구는 한 날의 무료함이 싫지 않다. 코로나가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니 저들을 어쩌면 좋은가. 구슬리고 어르고 달래고 마치 이 시절만 잘 지나고 나면 보다 나은 세계가 펼쳐질 것처럼 허황된 꿈을 심어준다. 아이들은 스무 살만 넘으면 별천지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빨리 어른이 되어 제멋대로 살고 싶어 한다. 이게 어디 아이들만의 일인가?

 

암울한 현실은 애나 어른이나 다를 게 없다. 다들 그저 돈돈거리며 살고 이를 위해 주의 축복을 바라고 누리기도 하지만 우리네 한 생의 끝을 누가 알 수 있을까? 그저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9-10).” 이것이 옳은 줄 알고 지나치게 선하기도 하였다가 온 인생이 물거품처럼 무산되어버린 어느 신앙 좋은 한 노인의 말로를 생각하였다. 저의 의롭고 선한 삶을 누가 그르다고 할 수 있겠나? 버는 수입의 반을 선교사나 주의 종들을 위해 사용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노년에 꿈꾸었던 공동체 마을은 도리어 섬겼던 저들에 의해 풍비박산이 난 셈이고. 그 와중에 마나님은 돌아가시고 말년에 혼자 남아 자식들과도 혼자 떨어져 산다고 하니. 누구의 구구한 사연을 접하고는 나는 더욱 숙연하여졌다. 전도자의 말이 절묘하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7:16-17).” 나름 애써 수고한 모든 나름의 자기 열심은 위험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저의 교훈은 하나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주를 경외하라는 것. 그러할 때 무엇에도 억매이지 않을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성장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버려야 산다.

 

내 의지, 나의 판단, 나의 기준이 얼마나 모순되고 어리석을 뿐인지.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7).” 그렇지! 현실을 보고, 내가 보는 것으로 행하려 할 때면 어림없다. 나는 어느 장로의 성실하였고 열심이었던 생을 반추하며 그것이 아무리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었다 해도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 그 사랑의 정체는 나로 하여금 주를 경외하게 하시는, 내 안의 어떤 경건의 비밀이 아닐까?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이를 알고 또 알고 싶어 하고, 믿는다. 믿어지는 것을 내 안에 확신하게 하시는 이가 계시다. 다만 신기할밖에. ‘다 한때 그러는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혼탁하게 뒤섞여 있는 무절제의 현실에서 감정의 과잉과 노력과 열심의 과잉과 선을 추구하는 희생의 과잉까지! 여러모로 하나님 없이 자신이 주인 되는 세상에서 사는 자의 안타까운 모습은 아닐까?

 

누구와 통화를 할 때면 늘 부산하고 바쁜 일상이라 저의 말마따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저의 믿음과 신앙도 바쁘다. 쫓기듯 성경을 통독하고 기도를 몰아서 몇 시간씩 하며 날마다 고시준비생처럼 열심으로 열심을 다하는데 그 영혼은 피곤할 따름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63:17).” 너무 열심이거나 너무 안이하거나,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는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아서. 어떤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며. 다들. ,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31:3).” 그러할 때 주의 말씀을 상기한다. 그의 약속을 붙든다.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67:5-7).” 주신 날에 무던할 수 있는 것이 지혜였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31:13).” 그러할 수 있는 세월이 이 땅에서는 묘연한가? 도무지 가망이 없는 것일까? 그 해결책은 오직 하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주를 바람은 주의 멍에를 메고 따르는 쉼이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이 모두는 주가 책임지신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 3:20).” 사는 일이 나의 책임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67:1-2).” 오직 주를 바람은 주가 더하시는 하루 이 한 날에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5).” 그러할 때,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6).”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