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예레미야 30:22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
시편 66:20
존재 자체로 이미 그 의미를 다한다.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선용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순응은 이를 더하신 이에 대하여, 그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신뢰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바꿀 수 없고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것에 대해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여! 나에게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이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문득 바울 사도의 증거가 떠오른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다섯 달란트면 어떻고 한 달란트면 어떻겠나? 그래서 서로 다른 서로를 주셨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4-5).” 그러므로 서로에 대한 신뢰는 어떤 기준이나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받아들임이다. 어디서 읽었는데 신경증환자의 경우는 ‘모두’, ‘늘’, ‘전부’라는 표현으로 싸잡아서 표현하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모두 날 싫어해.’ 또는 ‘늘 나만 힘들어.’ 또는 ‘전부 틀렸어!’ 하는 식으로 말이다.
탈무드에 보면 실제 열 명의 사람이 있을 때 한 명은 나를 싫어하고, 두 명은 나를 좋아하고, 나머지 일곱 명은 나에게 굳이 관심도 없다. 그럴 때 주로 나를 싫어하는 한 명 때문에 ‘모두’ 나를 싫어한다고 하거나 좋아하는 두 명을 의식하면서 모두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전부’, ‘늘’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원인은 모두 죄 때문이다. 죄는 마귀보다 무섭다. 이를 알고 내가 나를 이겨본다고 하지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그러므로 나의 순응은 하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주께 감사하는 것이 순응의 기본이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그 또한 나의 나 된 모습이니 주 앞에 나를 인정하는 것. 수긍, 긍정적인 포기, 죄를 자백함으로 주의 긍휼하심을 바란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이게 또 그처럼 어려운 일이어서 가장 쉬운데 가장 어렵다. 그래서 누가 말하길 ‘자신의 죄악 됨을 조금밖에 모르면 그리스도의 은혜도 조금밖에 알지 못하고, 오히려 곤고함이 많을수록 주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 나름 수고하고 애쓰는 마르다보다 주의 말씀만 귀담으려는 마리아가 복되었다. 말씀으로 비추고 마음에 비추어 행실을 돌아보는 것이 귀한 것이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그러므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 내가 애써 나를 경건하다 할 수 없고 그리 노력해서 될 일도 아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상한 심령으로 주께 의뢰하는 것.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7).”
그리하여 세월이 나를 이끌어가듯 말씀이 나를 선도하게 하는 것.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22).” 다만 주를 믿고 바라는 일이 순응에 달렸다. 속수무책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을 때 더더욱 주를 의뢰함으로 상대도 그리 이해하고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믿음은 나의 행함을 의지하지 않고 도리어 나의 수고가 걸림이 될 수 있음을 고백하게 한다.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롬 9:31-32).” 곧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33).”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주시는 어려움조차 우리로 선히 가게 하시려는 주의 선하심이다. 그런데 저마다 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10:3).” 즉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그리 한다면 더 나은 경건이 이루어질 것이라 유혹하는 사탄의 발상이 늘 우리 안에 있다. 가령 이 아이가 이처럼 와서 이와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는 데 따른 갈등은 엄밀하게 말해 내 안의 신경증적인 소모적인 자세이지 결코 선히 주를 의지하게 하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4).” 이미 주가 이루신 일이면, 더는 나의 의미부여가 소용이 없다.
즉 우리가 누구를 대할 때 ‘행위 차원’에서 보면 가시적인 성과나 어떤 결과를 놓고 평가하게 되지만 ‘존재 차원’에서 보면 그 자체로 주께서 의도하시는 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게 뚜렷해진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나의 주가 되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미 그리하신 일이다. 결국은 내가 바라볼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 저가 죽으심이 헛될 리 없다. 한 아이가 곁에 오고 누구를 보내시고 같이 무얼 하게 하실 때, 실제는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 아브라함이 갈 길을 잘 정돈하여 떠난 게 아니다. ‘말씀을 의지해서’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 오늘의 나에게 새삼 무엇을 강요하고 요구하시고자 주의 사명을 두시는 게 아니다. 아무리 어떠하든 가장 기본적인 명제에는 변함이 없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30:22).” 가타부타 다른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할 때 나는 다윗과 같이 안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시 66:20).” 이처럼 주를 바람은 단순명료할 뿐이다.
복잡하고 어려워지기 시작하면 이건 어딘가 내 안의 문제다. 아이를 두고도 뭘 어떻게, 하는 식의 마음 씀이 길이지면 그 기저에는 하기 싫은 마음이 깔린 것이다. 뭘 자꾸 내가 하려 할 때 주를 신뢰하는 의지는 약해진다. 나의 곤고함을 강하게 느낄 때 주의 도우심을 강하게 구한다. 결국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1:22).” 승리는 주의 것이다. 예수가 이기셨다. 십자가는 더는 끔찍한 형틀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제어하고 다스리신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딤전 6:16).” 말씀 앞에 서다 보면 모든 문제는 명료할 따름이다. 문제가 문제도 아닐 때 더는 문제될 게 없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그리 또한 두시고 조성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저는 우리의 왕이시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 15:3).” 우리는 저마다 자기 입으로 이와 같은 고백의 노래를 한다. 내가 누구를 대하는 데 있어 또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까지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이 얼마나 선택의 길이 여럿인 것 같나? 마치 내가 주도적으로 나의 길을 가는 것이 옳은 줄 알지만….
한 아이엄마는 중3 딸아이를 두고 싸운다. 학습지를 모두 찢어버려도 분이 식지 않아 학원을 다 끊고 애 핸드폰을 빼앗고 욕지기를 퍼부으며 사납게 굴었다. 갈 데 없는 아이가 울면서 아내에게 왔다. 더는 안 보내겠다는 아이엄마의 일방적인 통보가 있은 뒤였다. 그저 라면을 끓여 먹이고, 우는 아이의 어깨를 토닥거리는 일. 뒤늦게 아이엄마가 어쩌면 좋냐고 지청구를 늘어놓을 때 그 넌더리나는 푸념을 묵묵히 들어주는 일. 주를 바라며 사는 사람과 자기 의지로 사는 사람의 차이는 엄연하였다.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시 66:1).” 오늘 시편의 말씀은 원론적인 첫 구절로 집중을 모은다.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2).” 지금 그럴 정신이 있겠나? 이 애를 어쩌면 좋을까?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고, 그러할 때 성경은 우리에게 한 가지 사실을 일깨운다. 존재 그 자체로의 이유다. “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 (셀라)(3-4).” 여기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가 어찌 해서 이루어진 것보다 저절로 그리 된 게 더 많았다. 그때마다 주의 손길을 느끼지는 못하였다 해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주는 우리와 함께 하셨다.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5).” 그렇게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9).” 가정예배를 드릴 때면 우리는 종종 이와 같은 고백 앞에서 모든 산적한 문제들을 가벼이 한다. 주께서 다 이루어지게 하시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오늘도 어김없이 더하시는 이 한 날의 지금, 여기! 우리에게는 그뿐인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고백처럼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시 66:10-12).” 모든 게 다 주의 섭리라. “이는 내 입술이 낸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14).” 그러므로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17).” 곧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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