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레미야 29:11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시편 65:10
주께서 하게 하시는 일은 무난하다.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억지가 없다. 애써 기를 써야 되는 게 아니다. 가만히 몸을 맡기듯 주께 중심을 두면 된다. 오늘 말씀은 이를 엄밀히 구별하여 주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곧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시 65:10).” 족한 줄 알고 묵묵히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 은사였다. 이른 아침 우리는 만나 성경을 나누었다. 같은 길을 가는 이와의 대화는 막힘이 없고 그 마음도 온순하였다. 우리 안에는 누구나 ‘인정욕구’가 있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자기중심적이 된다. 왜냐하면 저의 인정은 나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 생에 막힌 담이 여럿 있다. 이를 거둬내지 않으면 농작물은 자랄 수가 없다. 은연중에 인정을 바라고 그것이 칭찬으로 돌아오면 유익한 것 같은데, 실은 칭찬보다 무서운 상하관계, 주종관계도 없다. 누가 누구를 칭찬한다는 것은 그 안에 평가와 진단이 내려져 상대를 하대하는 일이 된다. 가령 아이를 많이 칭찬하면 좋을 것으로 아는데 실은 더욱 더 아이의 영혼을 고갈시키는 것이 된다.
뜬금없기는 하지만 내 안에 그런 욕구가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 함께 무엇을 할 때 그래서 나는 ‘성경공부’ 또는 ‘상담’ 내지는 무슨 가르침 하는 표현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막연하게도 서열이 나뉘고 내가 네게, 또는 네가 내게 무엇이 되어야 하는 역할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저와의 첫 시간에서 이를 주의하자고 하였다. 각자의 묵상을 나누고 이러한 시간이 서로에게 유익할 것임을 확신하였다. 마치 내가 좀 더 나은 쪽이라 무얼 가르치거나 알게 하려는 게 아님을. 상대적으로 무얼 배우고 익혀 좋은 선생과 제자처럼 상하의 구분이 생겨나지 않기를. 꾸역꾸역 나 또한 미약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 주가 더하신 은사가 아니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즉 우리 사역자들이란 말씀을 은사로 받았을 뿐이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0, 32).” 말씀 붙들자. 말씀밖에 답이 없다. 최소한 우리에게는 그것이 사명이다. 돈 되는 일, 살 궁리, 가정 돌아가는 일, 사회 일… 하는 따위는 우리 몫이 아니다. 심리학적 용어로 쓰면 ‘과제 분리’가 이뤄져야 한다. 각자에게 주신 몫이 있는데 목사나 교사의 사명은 말씀을 바탕으로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이다. 물론 저의 과제도 내가 대신 할 수 없다. 자식이라고 해서 그 인생을 대신(또는 같이) 숙제하듯 해줄 수 없다.
그렇듯 서로의 사명이 하나이면서 여러 가지다. 그것에 개입하려 해서는 안 된다. 지원은 필요하다. 개입과 지원은 다르다. 개입은 참견이고 지원은 ‘어쩔 수 없는 일’에 같이 도와 협력하는 일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 말씀의 원리는 분명하다. 주신 이의 의도가 분명히 계시다. 어쩌다 그런 상황은 없다. 우연처럼 벌어지는 필연이다. 하나님의 오래된 계획이고 조성이며 건설이다. 나는 어제 우리의 만남을 그리 이해한다. 그러므로 서로에게 용기를 부여하는 역할이 필요하지, 칭찬을 듣거나 하려 하거나 더 나은 무엇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두신 날의 이유와 모종의 섭리는 주의 것이라. 오늘 예레미야서의 말씀은 이를 상기시킨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그곳에서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5).” 하신다. 지금 그게 할 소린가? 예레미야의 편지가 맞나? 정말 여호와의 말씀일까? 의심이 들 정도이다. 포로 되어 잡혀간 땅을 개간하고 일구어 텃밭을 만들고 거기서 나는 열매를 먹으라니!
더 나아가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6).” 서로의 수를 유지하라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당연히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하고 그곳에 안주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너희가 줄어들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한 술 더 떠서 다니엘과 그 친구들처럼 그곳에서 주어진 일에 성실할 것을 강조한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7).” 주는 오직 우리의 평안을 살피신다. 쓸데없는 말에 휘둘리지 않기를. 우리 안에 억압되어 있는 자아 중에 가장 고약한 것이 ‘인정욕구’인데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를 위해 신념을 불태우고 사랑을 갈구한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마치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과제로 여기고, 주의 사랑을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사야 하는 것으로 인식할 때도 있다. 그래서 내가 애써 수고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또는 저렇게 인정하여 축복하여 주실 것이라는 자기 욕구에 시달리는 것이다. 아니다! 우리는 이미 그 자체로 귀하다. 존재 자체로 몫을 다하는 것이다. 괜히 누구에게 짐이 되는 것 같고 제 몫을 다하지 못해 빙충맞은 것만 같고, 그러한 열등감은 더 강하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일으켜 왜곡된 열심을 이끌거나 ‘자기 몸을 불 사르게 내어주기까지 희생을 강요한다. 그러면 믿음은 어렵고 사명은 무거워 신앙은 고역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주의 멍에를 메는 일이다. 이는 그 첫 발이 내 짐을 내려놓는 일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28).” 저의 멍에는 가볍고 쉽다. 나는 가소롭지만 주를 믿는 게 안 믿는 것보다 쉽고, 목사로 사는 게 일반 성도나 주를 모르고 사는 일보다 쉽다. 좀 어폐가 있는 소리가 설명이 따라야 하겠지만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다 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교회 일이 지겹고 온갖 성도들을 건사하는 일이 어렵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나의 과제가 아니다. 우리의 은사는 말씀이다. 과제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누구 때문에 힘든 것이다. 저의 짐을 왜 내가 지려 하나? 목사는 예수의 멍에를 멜 뿐이다. 예수께서 우리 짐을 이미 다 지셨다. 다만 우리는 존재하는 것으로 족하다. 주가 이루신다. 오늘 시편의 찬양은 그것이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시 65:11-12).” 내가 무얼 해서 저 영혼이 구원 받는 것도 아니고, 한 뼘의 성장도 이룰 수 없다. 다만 나는 저의 존재로 귀한 것이다. 그리 두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13).”
가령 나도 자주 느끼는 민망함과 열등감과 공연한 부끄러움이지만 가족들의 희생과 저들의 후원의 손길과 늘 돌봄을 받는 일에 대하여, 그게 내 일이라면 민망한 것이다. 나를 보고 하는 것이면 열등감이 들어도 마땅하다. 괜히 저들에게 짐만 되는 것 같은 부끄러움을 가져도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은 말씀 전하는 일이고, 한 영혼을 두고 주의 마음으로 씨름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가족이 있고 어디 다른 성도가 있고 하는 구분이 없다. 그 자체로 존재의 가치다. 늘 이런 생각 뒤에는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 떠오른다. 저는 존재 자체로 그 사명을 다한 것이다. 특별히 뭘 위해 애쓴 것도 없고 나서서 복음을 전도하거나 심지어 고백한 일도 없이 그저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 생을 다하다 간 것이 고작 전부인 것 같지만, 저는 영광스럽게도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 우리의 사명은 무얼 해서 이룩하는 업적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 오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족하다. 누구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역할이면 그 또한 사명이다. 이를 비굴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정욕구의 하나로 스스로 자신이 자신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뿌듯하게 내가 이 정도도 이루었네, 하는 만족감으로 주 앞에 섰을 때 과연 주께서 저를 잘하였다 하셨을까?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그야말로 꼴불견이다. 그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 체험과 감상을 가지고 전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9:9).” 아무리 현실이 어떠하다 해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오늘 말씀은 그 끝이 칠십년인 것을 엄연히 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10).” 우리는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4:8-10).” 우리가 주께 사로잡힌 자로 사는 그 자체가 존재의 이유다. 다른 거 없다. 나는 요즘 이런 묵상에 젖어 있다. 내 안에 주시는 평안의 근거다. 내 뜻 같지 않은 자식들에 대하여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아이가 아무 것도 나아지는 게 없고, 교회도 부흥은커녕 늘 그 모양 그 꼴인 것 같아도… 그 자체로 존재의 이유와 영광은 충분하다. 주가 하실 것이다. 주가 세우시고 이루어 가신다. 어떠하든 주는 선하시다. 그러므로 오늘 예레미야는 강조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고로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12-13).” 이와 같은 모든 환경과 여건이 축복이었다! 하여,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시 65:10-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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