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전봉석 2020. 8. 8. 06:09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사니라

예레미야 40:6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편 76:10

 

 

포로로 끌려가던 예레미야는 사령관 느부사라단에 의해 미스바에서 놓여난다. 사령관 저의 입을 열어, “여호와께서 그가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제 이루어졌도다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40:3).” 미스바는 영토를 분배할 때 유다 민족에게 주어졌던 땅이다. 라마 비스베와 동일한 지역으로 보면 요단 동편 길르앗 지방에 있는 사사 입다가 암몬 자손과 일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혹은 다윗 왕이 도피하고 다니던 시절 모압 왕에게 부모를 의탁하던 모압의 미스바일 수도 있다. 여하튼 하나님이 느부사라단 사령관을 사용하시며, 예레미야를 미스바에 놓아준다.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사니라(6).” 혹은 사무엘 선지자가 각성과 회개를 위해 모이게 한 장소였다.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삼상 7:5).” 저기는 사막의 땅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부르실 때 광야를 거친다. 복음의 시작은 사막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복음서 중에 마가는 역사적인 배경도 예수님의 계보도 사회적, 문화적인 것들 보다, ‘복음-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기쁜 소식으로부터 말씀을 진술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1:1).” 하여 예수님도 사막으로 이끌려 공생애의 첫 시작을 이루셨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12).”

 

광야는 종말의 땅이지만 새로운 시작의 땅이기도 하다. 사막은 남김이 없고 사람으로 하여금 낭비가 있을 게 없게 한다. 선택 받은 사람에게 사막은 필수다.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탁하고 하나님께로만 돌봄을 받는 곳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 40년의 길을 돌았다. 불행이며 다행이고, 그 가운데서 온전히 하나님께로만 전폭적인 의지를 배웠다. 월 수 금, 나는 곧 목회를 시작해야 할 주의 종과 이른 아침 성경공부를 한다. 이런저런 저의 이야기 가운데서 마른 사막의 땅을 걷고 있는 힘겨운 발걸음을 본다. 죽자고 그 길을 피하다 너무 먼 길을 돌아 끌려왔을 때, 나는 신대원을 울면서 다녔고 실제 운전을 하고 학교를 가다 너무 울어서 고속도로 한 편에 차를 세우기도 몇 번이었다. 목사만 되면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이 흐를 줄 알았는데, 비로소 사막이었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로부터의 외면과 괄시는 말하고 싶지도 않다. 늘 그래도 몇 명씩 오던 글방 아이들도 그야말로 증발하듯 사라져 나 혼자 남게 되었다. 거짓말처럼 모든 게 사라졌다. 더는 예전에 좇던 즐거움을 추구할 수 없는 척박한 땅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저는 이를 예감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였다. 광야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하나님하고만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싫든 좋든 그 외에 모든 것은 다 증발한다. 어쩌면 마가는 첫 장의 말씀을 서술하면서 예수님의 사막을 먼저 알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예레미야가 바벨론으로 끌려가다 느닷없는 손길에 의해 놓여난 미스바를 보면서 광야를 연상한다.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포로를 바벨론으로 옮기는 중에 예레미야도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가다가 라마에서 풀려난 후에 말씀이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40:1).”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 뜻을 알려는 것 자체가 오만함의 일종이다. 마치 주의 뜻을 구하며 선택을 미루고 있는 것이 경건한 것 같으나, 그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안다는 것이 모순이란 생각을 못하는 것 같다. 역으로 내가 아는, 이해 안에 하나님의 광대하신 뜻을 제한하는 게 아니겠나? 나는 저의 뭉개고 미적거리는 태도에 일갈하였다. 목사 안수를 미루고 그럼에도 어떤, 주의 뜻을 구하는 데서 마치 사막의 초입을 보는 듯하였다. 아직 여분의 물과 양식이 있는 것이다. 사막은 보기보다 참혹하고 생각보다 잔인하다. 모든 것을 증발시킨다. 하나님밖에 의지할 수 없고 하나님의 돌보심만이 유일한 장소다. 오히려 외부의 어떤 도움도 방해도 닿을 수 없다. 그래서 사막은 그간의 유혹과 나의 미련과 아집과 교만을 불태워버리는 곳이다.

 

사막은 산상수훈의 여덟 가지 복을 체험하게 하시는 시간과 장소다. 사막은 심령이 가난한 자로 서게 된다. 다른 의지가 허용되지 않는다. 사막은 애통하는 자로 주를 구하여 주의 위로만으로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장소다. 사막은 온유한 자해가 뜨고 지고,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는 것으로 그의 돌보심을 만끽한다. 사막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게 하는 시간이다. 그와 같은 궁핍과 핍절이 오히려 전에 누리지 못했던 배부름을 누리게 한다. 사막은 긍휼히 여기는 자로 세운다. 척박한 환경에서 모든 생명을 사랑하게 한다. 사막은 마음이 청결한 자로 오직 주밖에 다른 구함을 허용하지 않음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다. 사막은 화평하게 하는 자로 세운다. 모든 고요와 평안이 비움과 비움을 통해 채워진다. 사막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로 기꺼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훈련의 장소다. 이미 천국을 소유한 곳이다. 사막은 그럴 수 없는 지경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돌아보면 외롭고 고독하였으나, 그때보다 나았던 시절도 없었던 것 같다. 시달림도 고통도 모두가 의미 있는 장소였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모든 선택 받은 사람들의 필연이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하는 예수님의 여덟 가지 이상과 완성의 복음의 시작이기도 한 것이다(5:3-10).

 

언뜻 겁부터 나고 자신도 없으나, 나는 저에게 그럼에도 주저하지 말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사막은 매우 유익하다. 조용한 독서와 깊은 사색과 묵상이 가능하며, 온전히 하나님과만의 시간이기도 하다. 어느새 나는 나의 사막을 사랑한다. 왜 이렇게 일찍 나오세요? 하고 물으면 나는 기꺼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와 시간을 위해서라고 말해줄 수 있다. 간단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하루 일상에서도 얼마나 번잡스런 일들로 하루가 금세 가는지 모른다. 누구와 전화도 해야 하고, 누가 오고, 어떤 이와 마주치면 안부도 묻고, 옆 사무실 누가 무슨 일로 들고 나는 것에도 들어주고 알아야 하고. 그러할 때 오히려 요즘은 일부러 일찍 서둘러 사막으로 나온다. 노인네 다 됐네? 하고 누가 놀려도,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이처럼 하나님과만 마주 앉는 시간이 귀하다. 미적거리지 않고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이른 시간에 교회로 나와 빈 사무실을 개의치 않고 찬양을 들으며 묵상 글을 읽고, 설교 원고 초안을 다듬고, 독서를 하고, 누구의 이름과 사연을 적고 주께 아뢴다. 그러다 보면 금방들 또 깨어나 번잡스러운 일상의 하루가 시작된다. 전에는 죽는 것처럼 싫고 힘들고 외롭고 고독하던 사막이 이제는 습관을 좇아 새벽 일찍 뒷동산으로 오르는 것처럼 산뜻하다. 더는 혼자가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고, 아무 일 없는 게 무료하거나 답답하지 않다. 모든 부분에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연마가 광야에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12:28).” 우리가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곧 경건이 된다. 함부로들 구는 세상이다. 밤새 저 아래 층 어디 평상에서 술 취한 사람 두엇이 꼬부라진 혀로 주정을 하다 졸다 날이 다 밝았는데도 여태 저러고 있다. 나는 이제 저들 영혼이 안타깝다. 불쌍하고 한심하다. 우리 안의 두려움은 바른 분별을 제시한다. 어제는 가정예배를 드리기 전에 아내에게 당부하였다. 스스로 사모인 것을 명심하고, 일개 돈벌이나 밥벌이를 위해 뛰어드는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말이 좋아 요양사자격증이지 단순히 밥벌이를 위한 것이나 노후대책의 하나로 여겨 그 일에 뛰어드는 일이면 처량하고 한심할 따름이다. 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단지 이 땅에서의 출세와 성공을 위한 피땀 흘려 열심인 공부가 아니기를. 이 시간이 오히려 주님을 더욱 의뢰하고 주만을 의지하는 내밀하고 충만한 만남의 장소이기를어쩌면 우리는 일생이 사막의 연속이다. 잠시 오아시스를 만나기도 하는 것 같지만 영구적인 게 아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 7:1).”

 

우리가 주를 경배하고 경외하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우리가 경배할 때 주가 임하시기 때문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 어찌 감히 주의 뜻을 알고 그의 뜻에 부응할 수 있겠다고 장담하나?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1:16).” 하나님은 경배를 요구하신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20:6).” 자칫 두려움이 상실되고 경건의 모양만 취하며, 주를 경외함이 와해되어 함부로 속단하다가는엘리의 아들들과 같은 최후를 맞는다. 어찌 좀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웃사와 같이 된다.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대상 13:9-10).” 감히 어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와 같은 최후도 경고라.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5:1).” 의도는 좋았으나 설마, 하는 순간에 무너지는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0-32).” 내가 뭘 좀 더 나은 듯 굴지나 않을까, 나는 이를 경계하고 주의한다. 사막은 이를 일깨워 온전히 주를 바라며 주만 의뢰하고 의지하게 하는 것이다그리하여 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76: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