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예레미야애가 3:33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시편 91:1-3
교회가 욕을 먹고 논쟁거리가 되는 시절이다. 나는 이를 피해 저들의 말거리가 되는 것을 주의한다. 이는 저들이 옳고 그름 때문이 아니라,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 어느 것도 주의 것이 아닌 것이 아닌 게 무엇이겠나?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이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것을 아셨다. 또한 부활이 없다 하는 이들임을 아셨다. 그런 그들을 대적한들 주 앞에 덕이 되지 않음이다. 피하거나 묵인하거나 심지어는 동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주의 말씀을 간단히 이해한다. 가령 교회로 인한 전염병 감염을 막기 위해 대면예배를 중지하라고 권고하면 이를 따를 뿐이다. 마치 교회에서 서로 얼굴을 보고 대면하여 예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더욱이 우리는 한 건물이 여러 채의 사업장이 있고, 더욱이 교회가 세든 곳에 여러 개의 사무실이 같이 쓰는 공간이라 혹여 불미스러운 일로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데 욕이 될까 하여… 아이는 평소대로 성경을 쓸 것이고, 보내준 설교원고를 보며 묵상할 것이며, 청년부예배를 다니던 곳의 온라인 영상을 보며 예배할 것이다. 우리 가족은 혹여 몰라 이번 주일과 다음 주일은 가정에서 드리기로 하였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해도,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20).” 저들의 심사는 어쨌든 트집을 잡아 이 고생스러운 전염병의 출처를 교회로 돌리고 하나님을 욕하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우리는 근신을 지켜야 한다.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잠 5:2).” 저들과 논쟁하고 싸워 이겨야 하는 싸움이 아니다. 말해봐야 소용없는 일들에 대하여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싸워 지켜야 하는 게 있고 가만히 떠나야 하는 것도 있다.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행 19:36).” 그런데 일련의 사태에서 두 갈래의 양상이 뚜렷이 드러나는 것 같다. 하나는 막무가내로 맞서 싸워야 하고 이를 마치 신앙의 굳건한 의지인 줄로 안다. 누구 목사는 그래서 더 집회를 강행하고 심지어 특별 기도회까지 열면서 마치 자신들의 믿음은 남다른 것인 것처럼 과신한다. 반대로 또 누구는 덩달아 교회를 욕하고 오늘의 현상을 싸잡아 믿는 자들의 문제로 매도한다. 그러니까 누구는 너무 지나치게 선하고자 하고 누구는 지나치게 자신의 악함을 옹호한다. 성경은 그래서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지나치게’라는 형용사를 각각 두 번씩 무려 네 번이나 연거푸 언급하면서 강조하신다. 형용사는 그 상태나 모양이다. 본질이 아닌 시늉이나 현상이다. 그래야 할 것 같은 의미가 모양이나 형태로 드러나는 일이다. 성경은 이를 다시 언급하고 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곧 우리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것이다. 일련의 사태를 무슨 신앙의 위기나 도전을 받아들여 공격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말의 올무’를 씌우려는 바리새인들에게 시빗거리가 되게 하고,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에게는 논쟁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저들의 결국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청와대 게시판에 사과글을 올려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사죄하는 믿는 이들의 행태 또한 ‘지나치다.’ 나는 오늘 말씀을 주목한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그렇다면 오늘의 이와 같은 ‘난리와 난리, 소문’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문득 드는 생각이 심판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연한의 종말과 최후의 멸망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경고일까? 이는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자의 것이다. 에녹은 심판의 경고인 므두셀라를 낳고 남은 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다 죽었다. 노아는 홍수 심판의 경고를 듣고 평생을 방주를 지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나 떠나라, 하는 말씀을 의지하여 약속의 땅을 향해 길을 나서는 아브라함을 묵상한다. 저들의 순종은 무모하고 답답할 따름이다.
예수님처럼 무력하고 제대로 된 항거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신 이도 한심할 따름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말씀에서 저들의 구별됨의 근거를 알겠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함이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이다. 오직 주만이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할 자임을! 그러할 때 오늘 이 땅의 몽매한 영혼들의 아우성의 올무에서 건지시고 심한 전염병으로부터 건지실 것임이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시 91:1-3).” 곧 우리가 주를 사랑하고 올바로 믿는다는 것은 어떤 투철한, 남다른, 독특하고 특이한 신앙의 행태가 아니다. 그러한 시늉이나 모양이 아니다. 이런 시국에 수련회를 강행하고 기도회를 열며 사람들을 붙들어두고, 마치 그러는 지나침이 참 믿음의 본질인 것처럼 강행하는 일거의 왜곡된 충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데 빌미가 되게 한다. 말거리가 되고 욕이 되어 싸잡아 모든 믿는 사람들조차 교회를 욕하고 하나님을 향해 혀를 쯧쯧 차게 하는 꼴이다. 이 무슨 망국의 짓거리인지!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14).” 사랑은 저를 아는 일이고 저를 앎은 말씀과 기도에서다. 서로의 단합과 그 과시하는 힘의 양상이 아니다. 예레미야는 이에 대해 강한 어조로 설교하고 있다.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애 3:29).” 차라리 자신이 옳다 하는 그 입을 좀 땅의 티끌에 대라! 입 좀 다물고, 쓸모없이 여겨질지언정 가만히 좀 있으라는 소리다. 그럼 혹시 소망이 있을지 모른다. 또한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30).” 교회를 치고 욕하고 막말을 퍼붓는 자들에게 항거하기보다 ‘오른 쪽 뺨을 치면 왼 쪽 뺨을 돌려대라’는 것이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도 그러하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 너무 속상하고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한 일 아닌가? 좀 천사들 몇 만 불러서 저들에게 본때를 보이셔야 하는 것 아닐까? 이건 무슨 바보 멍청이 쪼다도 아니고… 때리면 맞고, 빼앗으면 심지어 속옷까지 내주고, 누가 강제로 여기까지 오라 하면 저기까지 가주며, 부당하게 요구해도 이를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이신데! 어떻게 우린 그럴 수 있을까?
오늘 애가의 말씀은 이를 확증하신다.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애 3:31-32).” 주는 결코 우리의 그러한 천대와 업신여김을 받는 일과 억울한 사연을 모르실 리 없다. 오늘은 근심하고 이 수모를 당하나 이는 본래 주의 본심이 아니시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33).” 여기서의 인생은 모두의 인생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믿는 자들의, 믿음으로 겪는 고초의 인생이다. 그러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실 때, 자기 십자가는 다 팔자소관의 어쩔 수 없는 우여곡절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교회를 위해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를 내 육체에 채우는 일이 말이 쉽지 어디 그처럼 우월한가? 억하심정으로라도 예배를 강행하고 보란 듯 기도회도 열고 저들 앞에서 성령의 불이라도 쏟아 부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저주로 알게 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 않겠나? 나는 악의적인 기사와 그 밑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며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설교는 이어진다.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애 3:37-38).” 오늘의 이 모든 수모와 역경도 주의 능하심에서 나오는 게 아니겠나? 그러니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39).” 곧 오늘 내 안의 조심함과 두려움과 한 번 더 생각함은 행여 교회로 인하여 주의 이름에 욕이 될까 하여서다. 부디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40).” 우리는 저들의 지나침에 부화뇌동할 게 아니다.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41).” 주일 아침, 그래도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게 낫지 않겠나? 우리 가족끼린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거 아닌가? 하고 찜찜해하고 있던 마음이었는데,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57).” 말씀은 항상 진귀하게도 내게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그러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28).” 나는 점점 더 주의 말씀이 좋다. 바로바로 응답하신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33).” 이에 나는 더욱 주를 사랑하고 주의 말씀으로만 거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시 91:14).” 그리하여 나는 주께 더욱 간구한다. 그러면 주의 말씀이시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15).”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0) | 2020.08.25 |
---|---|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0) | 2020.08.24 |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0) | 2020.08.22 |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0) | 2020.08.21 |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0) | 2020.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