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전봉석 2020. 8. 24. 05:45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예레미야애가 4:17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시편 92:5

 

 

믿음이 양분되어 극단적으로 흐른다. 일련의 사태를 통해 누구는 죽음으로 사수해야 하는 것처럼 반기를 들고, 누구는 덩달아 교회를 욕하며 환멸에 빠진다. 다만 나는 주께 감사한다.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4:17).” 뜯기고 헐려 더는 가망이 없을 것 같은 지경에도 자기 확신과 자기 의를 붙들려는 데서 오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할 뿐이다. 감사는 어떤 처지에서도 내어드릴 수 있는 최소의 변호비용이다.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109:30-31).” 아니면 이 큰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116:12).” 갚을 길 없어 이 몸 바칩니다, 하는 성도의 고백이 감사의 원점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92:5).”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나는 그리 묵상한다. 사태는 엄중하고 위태로운데, 믿음의 사람들은 안이하고 저마다의 옳고 그름을 가지고 씨름하는 격이다. 교회가 그 중심에서 논란을 부추기는 것 같아 그로 인하여 나는 주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는 것에 분노한다.

 

그럼에도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116:12-14).” 오직 하나, 감사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다. 가족들과 함께 가정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나 같은 죄인이 목사인 것을 얼마나 감사해했는지! 또한 우리 가족이 모두 주의 은혜 가운데 믿음의 자녀들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였는지! 극단적으로 쏠리지 않고 또한 허망한 것을 좇지 않고 오직 주를 바라고 말씀만을 의지할 수 있어 얼마마 감사하였는지! 이와 같은 감사는 특이하여서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치겠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받겠다고 더욱 더 달라고 간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9:13).” 이와 같은 감사의 역설적인 은혜를 어찌 사람의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이 평강이었다. 감사의 역설이었다. 이치상으로는 얼굴도 들 수 없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죄인인데, 그러해서 더욱 더 주께 요구하고 간구할 수 있다니. 갚을 길 없는 은혜인데도 더 달라고 또 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감사의 힘이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3:15).”

 

다들 저마다의 이해와 근거와 확신을 붙들고 소리를 높여 신념을 다하는 일이겠으나 평강을 위하여 몸의 나머지 부분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니까, 감사밖에는 달리 드릴 게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제 읽은 슬픔의 노래에서도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3:58).” 하고, 지나고 보면 모든 게 다 주의 은혜였다. 이와 같은 은혜는 끊임없는 구원과 같아서 계속되어 또 날마다 받아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106:43).” 오늘도 우리가 처한 현실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지만, 그럼에도 주의 구원하심은 쉼이 없다. 아니면 주를 떠나 어디로 갈까?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지 말고 오직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삼상 12:20).” 성경의 교훈은 이와 같이 한결 같을 뿐이다. “돌아서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따르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21).” 그리하여 나는 누구와 기꺼이 더는 같이 하지 않는다. 또는 누구와 함께하여 이 길을 간다. 헛된 것을 따르지 않으려고 말이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22-24).” 수천 년 전 사무엘의 음성이 오늘 이 시대에도 동일하였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가 아무리 세상에 가득하나 주께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거역하므로 죄과가 땅에 가득하나 그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에게 버림 받은 홀아비는 아니니라(51:5).” 그러니 우리가 둘러앉아 주일을 지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였다. 앞서 나는 아이와 통화로나마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여 저를 진정시켰다. 저마다의 주장이 어떠하든지 나는 묵묵히 말씀으로 서고, 행여 교회가 주의 이름을 나타내는 데 있어 덫이 될까하여 조심 또 조심할 따름이다. 내가 옳은 길을 따르는 게 아니라, 다만 말씀 곁에 설 뿐이다. 누구와는 연락도 않는 까닭은 저의 주장과 생각과 사용되는 언어들이 말씀과 멀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는 일이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벧후 2:20-21).”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전날 친구와의 통화에서 기껏 믿음으로 교회를 잘 다니는가했는데, 일련의 사태를 통해 저는 예전 말투로 돌아갔다. ,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 아니면 언제 어디서 잃어버리고 엠마오로 내려가고, 도로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할지 모른다.

 

바울의 경고도 그러한 게 아니었을까?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고후 13:6-7).” 즉 그래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이는 믿음이 없이는 가질 수 없는 선한 두려움이다. 나대고 우쭐하여 자신을 옳게 여기며 누가 뭐라 한들 마치 굳건할 수 있을 거라 자부하는 위인이면 이런 모습을 오히려 흉이 된다고 여기지 숨길 텐데. 종종 죄를 지어 버림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으로는 버림받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는 일이고, 그 믿음의 용기로 내 안의 죄악 된 마음과 싸울 수 있는 힘이며, 거듭 또 실패하고 좌절하여 낙심 가운데서도 주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다. 이는 욥의 진술에서도 읽힌다.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23:2).” 이와 같은 억눌림에서도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3).” 하는 통회하는 마음이었다.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4-5).” 나의 연약함을 부여잡고, 주께 아뢰고 말씀 앞에 나를 이끌어 세우는 일이다.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6).”

 

이렇듯 어줍고 형편없는 믿음인데도 주는 도리어 내 말을 들이시리라.’ 감사의 역설은 감사함으로 더욱 뻔뻔해져도 된다. 할 말이 없고 그저 숨고만 싶고 부정하는 삶인데도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41:4).”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주장하시며 홀로 주인 되시는 이가 나의 구주요, 나의 영원하신 만유의 주재이시며, 나의 전부가 되심을. “나는 지난 세월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하노라(29:2).” 하는, 오직 주만을 바람이었다. 오늘 시편으로 이를 찬송하며 감사한다.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92:1-3).” 이 아침, 감사의 위력을 새삼 묵상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4).” 비록 시국이 어수선하고, 사람들은 갈팡질팡하나,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5).” 감사는 푯대를 바로 알려준다. 어떠하든 올바른 이정표대로 나아갈 뿐이다.

 

저는 긍휼하심이다.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109: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