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전봉석 2020. 9. 5. 05:49

 

 

내가 사로잡힌 자에게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모든 일을 말하니라

에스겔 11:25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편 104:33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나에게 그 이야기를 열어 들려주심은 너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어 우리 모두로 하나님의 이야기가 되게 하신다. 참으로 어지러운 시국이다. 이때에 나는 더욱 단순해져 주만을 바란다. 그리고 나에게 주신 사명을 귀히 여긴다. “내가 사로잡힌 자에게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모든 일을 말하니라(11:25).” 나는 아침에 성경공부를 하며 젊은 목회자에게 그리 일렀다.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가. 말씀으로 더욱 말씀에만 머물자. 목사란 자고로 말씀을 떠나서는 할 일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104:33).” 오늘 아침에 더하시는 말씀도 나의 나 된 것에 대해 명심하게 하시는 것 같다. 말씀 안에서 우리는 하나다. 오늘 에스겔은 이를 강조하고 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19-20).” 주의 역사하심이 크다. 이 의는 온전히 주의 권한이다. 우리의 행위는 원수 아래 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0).”

 

우리의 믿음이란 무언가. 받아들임으로 맡김이다. 그럴 수 있는 게 주를 신뢰함이고 의지함이다. 믿음보다 큰 순종은 없다. 엄청난 기적이다. 어찌 내 안에 이 같은 말씀의 비밀이 믿어지는지, 나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율법에 속하였다함은 원리 원칙을 준수하며 그러한 자신의 행위로 평가 받기를 선호하는 것이다. 이를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은 그러느라 그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퍅퍅할까. 그 영혼은 피폐하며 은혜의 단비가 스밀 수가 없다. 저들의 행각은 뚜렷해진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2:18-21).” 한 마디로 말은 번지르르하고 생각은 고상한데 정작 자신은 자기주장을 도둑질하는 자로 사는 것이다. 말과 삶이 다르고, 남에게 엄격한 것이 자신에게는 관대한 것이어서 늘 보면 그 입에 변명과 핑계를 한 모금씩 물고 산다. 이를 위해 남을 비난하고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마치 정치란 그런 것이어서 자기 일을 묵묵히 하기보다 남에 대해 말하느라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꼴이라. 교회가 정치놀음에 놀아나면 목사는 율법주의자로 도둑질하는 자가 되고, 교회는 진영논리에 함몰되어 헤어 나올 길이 없다.

 

일련의 상황은 모두 주의 소리라. 나는 어제 설교원고를 늦게까지 고쳤다. 제목을 두는 데 여러 번 다른 것을 붙였다. 그만큼 주제를 바로잡지 못한 것인데, 이랬다저랬다 전하고 싶은 말씀에 할 말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누가 말하길 겨울 가정예배 수준에 한두 명 더 올까말까 한 처지에! 나는 함께 성경 공부하는 젊은 목회자에게 그것은 주가 하시는 일이고, 우리는 몇 명이든 누구 앞이든 말씀으로 씨름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를 놓치면 사람 수를 센다. 더 많은 사람을 끌어 모으려하면 장사꾼이 되게 돼 있다. 사람을 살피고 사람 수를 헤아리다 어느새 그 일도 먹고 살기 위한 길이 되어버리면 더는 의미가 없어진다. 나는 이를 절대 강조하고 당부하며 내 스스로도 놓지 않으려 한다. “나의 기도를 기쁘게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104:34).” 목사가 여호와로 즐거워함을 잃으면 더는 가망이 없는 것이다. 그 즐거움은 말씀으로이고, 우리는 말씀 앞에 앉는 시간이 가장 귀하고 즐겁고 기쁜 일이다. 이 맛을 보아 나에게 보이는 것을 저들에게 들려주어야 하고, 나에게 들리는 것을 저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게 단 한 명이면 어떻고 그마저도 나 하나로도 족한 것이다. 엄밀하게는 주의 은혜란 개별적인 만나와 같은 것이다. 어떠하든 나의 의로, 그 수고와 노력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고, 의롭다 하심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3:11).” 각자 저마다의 주의와 주장과 주관을 가지고 사는 인생에서, 우리에게 더하신 사명은 무얼까?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0:38).” 나는 저에게 이를 강조하고 싶었다. 즉 모든 말씀은 서로 짝을 이룬다. 좀 더 부연설명이 필요하지만 아무 구절이나 갖다 놓아도, 각각의 모든 구절은 하나로 이어져 하나님의 이야기가 된다. 나의 이야기, 너의 이야기, 우리 가정들의 이야기 하나하나는 개별적이나 그 모든 이야기는 한 데 이어져 하나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를 성경의 원리에서 또 전능자 하나님 한 분이 통치하시는 이 땅에서 바로 알고 맛보아 증거 할 수 있다는 특권은 참으로 놀라운 위치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1:7).” 또한 서방이든 동방이든, 이름도 없는 작은 나사렛이란 마을에 사는 흔하디흔한 마리아란 이름의 한 처녀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나?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4:18).” 우리 사람이 어떠한가를 저는 누구보다 더 잘 아신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15:15).” 왜 그러시는 것일까? 우리의 행위로는 누구도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3:11).” 다만 우리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

 

나는 이와 같은 성경의 진리 앞에 안도한다. 하나님이 통치자요, 주권자가 되심을 참으로 다행이라 여긴다. 내가 해야 하는 의라면, 나는 어떤 식으로도 감당할 수 없다. 기껏 자신도 소경이면서 어둠에 있는 자들을 어찌 인도하겠나?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2:19-21).”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 떨 줄 알아야 한다. 특히 나는 전도사와의 만남과 저와의 성경공부에서 얻는 것이 많고 전하고 하는 것이 많다. 자칫 누구보다 우리는 교회를 망가뜨리는 일에 앞장설 수 있는 사람이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3:6).” 저의 말이 오늘 우리를 두렵게 한다. 행여 나는 말씀으로 말씀의 은혜 앞에 서지 않고 스스로의 행위에 머문다면 이보다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우리는 태곳적에 스스로 의에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3:24).” 죄의 결과이다. 그런 것을 의를 행하고 율법으로 나아가는 일은 하나님과 대적이 되는 것과 같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7:10).” 율법은 다만 육신을 정죄하는 일에나 효력을 다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주의 은혜를 바라게 한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3:21).”

 

왜냐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나의 행위로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알면 알수록 오늘 시편의 말씀이 은혜로만 다가온다.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104:28-29).” 아, 우리는 주 없이 살 수 없고 주의 은총이 아니면 한 시도 평안할 수가 없다. 주께서 우리를 기쁘시게 받으심은 우리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인함이다. 그러므로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30).” 아니면 살 수가 없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