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전봉석 2020. 9. 4. 05:53

 

 

그 얼굴의 형상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얼굴이며 그 모양과 그 몸도 그러하며 각기 곧게 앞으로 가더라

에스겔 10:22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시편 103:15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신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10:18).” 본래 주께서 그의 눈과 귀를 성전에 두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주의 영광이 점점 성전의 문지방으로, 그룹들 위로, 동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본다. “그 온 몸과 등과 손과 날개와 바퀴 곧 네 그룹의 바퀴의 둘레에 다 눈이 가득하더라(12).” 그 눈들이 우리의 삶을 감찰하신다. 일련의 사태를 보며 믿음으로밖에는 달리 이와 같은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을 한다. 주장은 각각이어서 들을 게 못 된다. 어느 쪽이냐? 묻는 데에도 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다만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는 해야 할 바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03:22).” 다른 데 신경 쓸 거 없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2-14).”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배겨낼 재간이 없다. 무엇이 옳은지, 누구 말이 더 성경에 가까운지, 나는 어느 쪽인지 따위에 관심을 둘 겨를이 없다. 다만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1).”

 

하나님만 바라자. 믿음이란 그처럼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포용하고, 인정하고,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신뢰하는 일이다. 무엇을?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말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2).” 앞서 간 믿음의 사람들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15:11).” 시대마다 주의와 사상과 주장이 어떠하였든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우리의 받은 직분은 막중하여서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고후 4:1).” 내가 하려는 것을 버리고, 온전히 이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여 주의 영광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오늘 우리 교회들이 이 지경이 된 데는 다들 저마다의 복음을 붙든 것이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11:4).” 사느라 급급한 현실에 맞게, 저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는 정도에서 군중을 모으는 데에 급급했었다. 그 결과 감사는 잃고 요구만 와글와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2:6-7).”

 

그러는 데 있어 말씀은 오직 믿음을 주목하게 하신다. 믿음의 선조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11:13-14).” 다들 당장 눈에 불을 켜고 현실적인, 남들처럼, 더 나은 조건과 결과를 얻고자 하여 믿음의 본질은 훼손되고 즉흥적인 감정만이 지배하는 교회가 되었다. 이를 성경은 가감 없이 우상숭배라 일갈하신다. 교회를 빙자한 정치 선동의 장이 되었고 말씀을 빙자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리 열심이었던 자의 절규가 들린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성심이었고 열정적으로 뛰었던 저의 수고가 실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으니,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 하는 한탄의 통회가 느껴진다. 우리에게 두시는 믿음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오직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12-14).” 우리의 본질은 주를 찬송하는 것이다. 송축이다.

 

오늘 시편의 찬송도 그것이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103:8).” 아니면 살 수가 있나? 여기까지 함께 하신, 아버지의 품이었다.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 7:12).” 이를 망각할 때 하나님을 이용하여 우상화하는 작업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진다. 그래서 나는 목사가 현실 참여를 운운하며 선동하는 일을 혐오한다. 그 속은 불순하다. 우리의 의로움은 절대적으로, 누구도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의롭다 하시는 이의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그렇게 나의 죄과를 멀리 하시는 주의 긍휼하심이 의로운 것이다. 오늘 시편은 이를 일깨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103:3-5).” 이는 내가 받을 자격이나 그만큼의 요건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주의 긍휼하심으로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8).” 이를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는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5:2).”

 

누구는 자꾸 우리 목사님이 그러는데, 우리 목사님이하면서 어린아이 같은 신앙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또 누구는 자칭 자신이 곧 복음이라. 뭐 그리 억울할 정도로 내세울 게 많은지 모르겠다. 이렇게 살았고, 저렇게 섬겼다는 식의 공치사는 주 앞에서 민망하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3).” 뒤늦게 부리는 노욕(老慾)은 오늘 우리 사회를 어지럽힌다. 저들의 공로는 가만히 있어도 인정받고 공경 받을 만한데, 자신이 마치 이 땅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이루어 온 주역임을 스스로 내세우며 안하무인격으로 완고하게 구는 것이니, 이를 교묘히 선동하고 이용하는 언론과 정치 진영의 불순함에 나는 치를 떤다. 같이 부화뇌동하며 득을 보는 일부 젊은 것들의 입을 나는 혐오한다. 말에 품격은 사라지고 막말과 감정으로 치달은 언어는 그 어떤 저주의 말도 서슴지 않는다. 믿음으로 해결되는 신앙은 없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야 한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4).” 이 복음의 비밀은 믿음의 비밀이기도 하여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9).” 믿는 자에게는 천국의 열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6:19).” 이는 막중한 일이다. 두렵고 떨리는 책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18).”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3:7-8).” 오직 주만 바라고, 오직 성경만 붙들고, 오직 말씀으로만 그 길을 더듬어서,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103:6).” 오늘 시편의 말씀은 궁극적인 우리의 처신을 일깨우신다. 여기 이 땅에서의 인생이란 다만 찰나적인 것이어서,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15).” 하나님도 이를 다 아신다. 오늘 우리 교회들 가운데서 주의 영광이 떠나는 일이 없기를, 부디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22).” 우리는 지금처럼 우왕좌왕 길을 바꿔가며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바쁜 일상의 사람들이 아니다. 지혜자는 조언하였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8:30-31).” 우리의 기쁨은 여기가 아니다. 여기 이 땅에서는 주의 인자와 긍휼하심으로 산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03:12-14).”

 

더 말해 뭐할까.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17-18).”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었고, 믿음으로 오시는 성령이었다. 이에 이 또한 능력이라.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20).” 그러므로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21-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