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전봉석 2020. 9. 6. 05:47

 

 

나는 여호와라 내가 말하리니 내가 하는 말이 다시는 더디지 아니하고 응하리라 반역하는 족속이여 내가 너희 생전에 말하고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12:25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시편 105:3

 

 

묵시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삶도 일반적인 삶과 다를 게 없다.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말이 그가 보는 묵시는 여러 날 후의 일이라 그가 멀리 있는 때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하느니라(12:27).” 그리스도인의 삶이 다른 까닭은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105:4).” 우리는 우리의 권능을 구할 줄 안다. 권능이란 어떤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 자격이다. 욥이 스스로는 포기할 수 없었던 것,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27:5-6).” 자신이 죽기 전에는 자신의 온전함을 버리지 않고, 그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않겠다고 한다. 설령 당면한 현실이 그를 노엽게 할지라도 스스로의 생애를 비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는 부여받은 권능 때문이다. 바울도 그러하여서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자신은 누구에게도 판단 받지 않으며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판단하지 않겠다고 한다. 자신을 향한 심판은 오직 주께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저는 누구인가? 바울 이전의 사울을 생각할 때 우리는 저의 말이 교만하게 들리기도 한다. 욥의 친구 빌닷의 말처럼 욥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보면, 특히 열 명의 자식들이 송두리째 죽은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라는 비난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사탄은 이처럼 우리를 수시로 공격한다. ‘그슬린 나무처럼 쓸모없음을 강조하며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의 양심을 찌른다. 저의 근거는 율법이다. 그것에 비추어 우리는 모두 죄악 되다. 이러한 죄에 억눌리면 우리는 살 수가 없어 천하의 다윗도 절규하였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51:3).” , 그 죄가 얼마나 지독하였으면 뼈를 꺾는 것 같이 즐거움을 잃었다고 한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8).” 사탄이 노리고, 율법이 요구는 것은 그러하다. 우리가 성경, 묵시를 바로 알지 못하면 스스로의 죄책감에 눌려 숨도 쉴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의 대언자이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보증이 되신다.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14).” 이를 위하여 죽음으로까지 우리를 담보하신 것이다.

 

나는 작성한 설교원고에 밑줄을 그으며 다시 묵상하다, 이는 우리에게 주신 권능이라는 사실에서 새삼 놀라웠다. 즉 한 사람이 대통령으로의 권한을 부여받아 나라를 이끌어갈 때도 그의 권한은 막강하다. 하물며 이 땅에서 자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고작 5년짜리 임기의 권한도 그러한데 우리의 영원한 권한, 그 권능을 붙들고 욥과 같이 바울과 같이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으며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성경에도 이르기를 이를 정죄하는 사탄을 하나님은 오히려 책망하셨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3:2-3).” 나는 요즘 이 말씀에 푹 빠져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도 더러운 의의 옷을 입었을 뿐이다. 아무리 선을 행하고 천년의 갑절을 살며 의를 행한다 해도 우리의 옷은 더러울 뿐이다. 의의 왕 여호와 앞에서 무엇도 스스로도는 선하고 의로울 수 없다. 이에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4-5).” 나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입히시는 이는 오직 주 하나님 한 분이시다.

 

비록 아직은 우리가 여호수아와 같이 더러운 옷을 입고 이 땅에 살며 주 앞에 서서 살아가고 있다 해도, 그것으로 가장 절친하고 가까운 이들이 정죄하고 비판한다 해도, 그래서 사탄은 우리의 양심을 노리고 수시로 찌르고 윽박질러 주눅 들게 하고, 열등감과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해도, 우리는 욥과 바울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처럼 담대히 주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이 의는 내 의가 아니다. 내가 이루어 이만큼을 붙드는 것이라면 나는 수시로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땅하여 누가 뭐라 하기 전에 내 안에 찌르는 영이 있어, 나를 억압하고, 주눅 들고, 위축시켜버린다. 그러나 시편의 말씀은 우리를 일컬어 권능 있는 자들아! 하고 부르신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29:1).” 우리의 이 권능은 주의 능력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105:4).” 저는 누구신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운다면 죄만 남는 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고전 10:10).” 우리의 가장 큰 난제는 원망이다. 수시로 이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래 이 땅에서 낳고 자라고 교육받은 존재들이라, 어김없이 이 땅의 기준과 잣대로 스스로를 정죄하려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이 일반인으로 사는 것과 다른 것은,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돌아보면 모든 게 감사뿐이라. 때론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4:17-18).” 오늘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땅의 일희일비가 아니다. 잠깐 보이는 것으로는 원망뿐이다. 왜 저들과 같이 고통 가운데 내버려두시는지, 더러는 더 안 좋은 환경과 여건에 홀로 남겨두시는지, ‘환난의 경한것으로 우리의 중한 권능을 망각할 때가 있다. 가령 좋은 대통령은 모든 이를 이롭게 하며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와 공정을 가지고 부여된 권능을 행사하는 것이다. 당연히 오합지졸들처럼 이래서 저쪽이 들고 일어나고, 저래서 이쪽이 반대하며 지지를 철회하기도 한다. 세상 모두에게 환영받는 권능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뭐 대단히 정치에 대해 해박한 지식과 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누가 됐든, 참 골치 아픈 일이겠다는 생각은 늘 든다. 사람들? 잘도 쓸려 다니는 안개 같아서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이 짙게 내려앉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한 하늘이 드러나는 변덕스러운 존재들이다. 왜 성경은 잠깐 보이는 환난의 경한 것이라 했는지 알겠다. 슬픔도, 어떤 고난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3:3).” 말 같잖은 말들이 널렸고, 주장 같잖은 주장이 사람들을 선동한다. 무슨 개소린가 싶은데 또 저의 말에 동조하여 세력이 확장되기도 하고, 이를 돈 받고 변호하는 치들도 수두룩하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4).” 저들이 그처럼 주장하는 것들 할례파냐? 무할례냐? 율법에 바르냐? 그르냐? 하는 따위의 소리에 휘둘릴 거 없다. 그럼에도 저들 가운데서 화목하라 하심은,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11).” 우리는 누구의 지지와 동조와 같이 하는 세력으로 평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욥은 외롭지 않았고, 바울은 사람들이 뭐라 하든 개의치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만 절규하고 자복하였지 어디서도 꿀리지 않았다. 특히 저는 고난의 원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105:18-19).” 말씀이 단련하시게 두라. 말씀은 반드시 응하신다. 묵시란 필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아니할지니 내가 한 말이 이루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12:28).”

 

그러므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105: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