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30편 /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전봉석 2020. 9. 11. 15:17

20200913 주일

 

시편 30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들어가는 말

 

오늘 시편 30편의 말씀은 앞에 부제가 붙기를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라 하였다. 실제 다윗은 성전을 건축도 하지 못하고 준비만 하다 그쳤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완공하였다. 그런 그가 앞서서 완공 때 부를 노래를 지었는지, 후대에 이르러 그리 낙성가로 붙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얼핏 들으면 그 내용이 좀 이상하다! 첫 소절부터가 눈물겹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1).” 이는 건축물의 완공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라, 은유적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별된 곳으로 완성되어지는 의미로 읽힌다. 바울의 진술에서 이를 확증할 수 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곧 우리 자신 하나하나가 주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완공되는 날? 우리가 부를 찬송이다?

 

먼저 끌어내다는 타동사가 눈에 들어온다. 어디서든 끌려나올 때, 달가울 리 없다. 한데 그게 대적 앞에서다. 대적이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끌어내셨다!? 문득 오늘 우리 사회에서 교회가 처한 현실을 보게 된다. 교회가 사회적 조롱거리가 되고, 믿는 자들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시점에 이 첫 구절은 뜻이 매우 깊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7).” 곧 우리 성도들은 그렇게 더럽혀지고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뒤에 이어서 하고.

 

오늘 시편 30편을 낙성가라고 하면, 지난 주일에 나눈 시편 29편은 착공가로 봐도 좋을 것 같다. 291절에 우리는 엄연히 권능 있는 자들이다. 그 권한은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의다. 그런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의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권능은 주의 성전으로서의 권능이다! 의롭다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이다. 이 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의 의다(3:24).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공의다.

 

욥이 자신의 공의를 굽히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27:5-6).” 공의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의이기 때문이다. 저는 그래서 자신을 자책하기는커녕 자부하였다(31:1, 7, 18, 24). 가령 아브라함의 의도, 저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11:8).” 그럴 수 있었던 믿음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것이다. 앞서 구원의 방주를 지었던 노아를 의롭다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저는 그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6:9).” 바울도 이를 알았다. 그래서 누구의 판단도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그럼에도 왜 자주 걸려 넘어질까? 아브라함이 완전했나? 노아가 완벽했나? 성경의 어떤 믿음의 사람도 그 치부가 가려지지 않고 모두 성경에 드러나 있다. 야곱의 이기적인 태도, 모세의 주저함과 혈기, 다윗의 간음과 살인교사 등 저들의 죄악을 그대로 진술하면서도 저들을 의롭다고 한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공의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의롭다 하시는 의다. 사탄의 농간과 우리 육신의 본성은 서로 통한다. 사탄은 그런 우리를 정죄한다. ‘그슬린 나무처럼 쓸모없고, 하찮고, 쓸모없다고 하나님 앞에서 공격한다. 가령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공략하며 정죄하였다. 하지만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은 오히려 사탄을 책망하셨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3:2-3).” 그리고는 천사들을 시켜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히셨다(4-5). 이는 엄연히 우리의 의로운 옷이 아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우리의 거룩한 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은 의의 옷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53:4).” 그것은 우리가 회심하기 전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이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43:25).” 칼빈의 표현처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더는 누구도 우리에게 우리의 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우리는 이를 믿음으로 권능의 자격을 획득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즉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음으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더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보응은 없다. 성령이 보증하신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5).” 그런데도 사는 게 고달픈 까닭은 여전히 우린 죄악 된 몸을 입고, 죄악 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곧 우리 육신의 본성은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을 향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그러니 잘 믿으면 잘 믿어서 고달프고, 안 믿으면 안 믿어서 고달픈 게 인생이라, 이는 모두 헛되다(1:2).

 

그럼 그냥 죽을 날만 기다리고, 천국에 갈 때까지 별 수 없는 일일까?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것은 새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거듭난 증거는 성장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4:13).”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성장이 없는, 곧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다(2:17). 바로 오늘, 우리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 예수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8:34).” 뿐만 아니라, 성령도 우리 안에서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26).” 즉 우리는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 살아서 사는 날 동안 믿음으로 성장해야 한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스라엘이 여수룬으로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44:2).”

 

육신을 입은 동안 우리는 누구나 연약하다. 그러나 믿는 자로 살면서 남다른 특권은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을 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62:8).” 시시로, 살면서 사느라 고달플 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주께 나의 마음을 토로하는 것이다. 곧 우리의 기도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이 거짓되다. 입에 발린 소리가 반이고 감정에 이끌려 사욕에 따른 요구가 대부분이다. 우리 기도는 가증스럽다. 그러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기까지,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신다. 언제까지? ‘나의 슬픔이 기쁨이 되기까지곧 우리가 완공될 때까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그리하여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5:11).” 심지어 이 땅에서도 우리의 즐거움은 구별되다. 필히 완공될 하나님의 성소로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 때에 우리가 부를 낙성가를 보자.

 

1, 우리는 주를 높인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1-3).”

 

첫째, 주께서 나를 나의 원수, 대적들에게서 끌어내셨다. 둘째, 그것으로 나의 원수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되었다. 셋째, 내가 주께 부르짖으면 언제든 주께서 나를 고치신다. 넷째, 내 영혼은 이미 지옥에서 건진 바 되었다. 고로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44:23).” 때로는 우리의 현실이 비루하기 짝이 없다 해도, 그래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3:17-18).” 이것이 우리의 노동가이다.

 

2, 우리는 주의 성도들이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4-6).”

 

첫째, 이제 우리의 신분은 뚜렷하게 주의 성도이다. 둘째, 성도란 주의 거룩하심을 입었고 이를 기억하고 감사한다. 셋째, 행여 우리가 잘못을 했을 때도 주의 노염은 아주 잠깐뿐이다. 넷째,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은총은 평생이다. 다섯째,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형통함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면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 곧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 ‘그리스도의 향기(2:15). 이에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7:18).” 우리가 그 증거다.

 

3, 우리는 주의 은혜로만 산다.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7-10).”

 

첫째, 은혜는 매일의 것이고 날마다 새롭게 부어지는 것으로, 잠시라도 가려지면 근심이 엄습한다. 둘째, 그래서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하고, 기도는 영원토록 이어져야 한다. 셋째, 아니면 천하를 다 얻고, 무덤에 내려간다 한들! 그때에 우리의 찬송이나 진리가 무슨 소용이겠나? 넷째, 고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8).” 그러므로 오늘,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118:17).” 이것이 오늘을 사는 이유다.

 

4, 우리의 감사는 이어져 영원토록 흐른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11-12).”

 

첫째, 구원은 곧 희락이다. 둘째, 주께서 오늘도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신다. 셋째, 오늘의 슬픔을 벗기시고 기쁨으로 옷 입혀 띠 띠우실 것이다. 넷째, 이는 내가 받을 영광이면서 주를 찬송하는 영광이다. 다섯째, 그러므로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이에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3:10).”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엄청난 은혜 가운데서 산다.

 

 

나오는 말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62:8).”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우리는 엄연히 주의 백성들이다. 이는 복음의 기초다. 이에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11:29).” 우리가 주의 권능으로 거룩한 옷을 입고, 그 말씀에 힘입어 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평강을 주시기 때문이었다(29:10-11). 이 날이 다하고 나면, 우리는 슬픔의 베옷을 벗고 기쁨으로 띠 띠워, 나의 슬픔은 변하여 기쁨의 춤이 될 것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30:11).”

 

오늘을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어는 기도다. 이를 시편은 마음을 토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람 붙들고 이런저런 말을 해본들? 가족도, 친구도 덩달아 지칠 뿐이다. 그러할 때 우리의 기도는 성령의 간구로 더해진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8:26).”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까지 흠향되어 올라가고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8:3).” 그때도 하늘 우편 보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8:34).” 이로써 아무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완공되어 봉헌될 각각의 주의 성전이라. 이로써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