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에 네 입이 열려서 도피한 자에게 말하고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너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에스겔 24:27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편 117:1-2
안이하여 그저 무심한 자들에 대한 음성이다. “인자야 내가 그 힘과 그 즐거워하는 영광과 그 눈이 기뻐하는 것과 그 마음이 간절하게 생각하는 자녀를 데려가는 날, 곧 그 날에 도피한 자가 네게 나와서 네 귀에 그 일을 들려주지 아니하겠느냐(겔 24:25-26).” 주의 진노 앞에서 에스겔의 심정을 상상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사랑하는 자들을 데려가시는 날, 울지 못하고 오늘 우리의 당면한 현실의 심각성을 일깨워야 했던 에스겔의 사명을 묵상한다. “그 날에 네 입이 열려서 도피한 자에게 말하고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너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27).”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목적은 하나뿐이다. 죄악 된 현실에서 본분을 알게 하시려는 것,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시 50:3-5).” 태만한 신앙은 하나님을 좋을 대로 바라고 입맛대로 추구한다. 이를 부추겨 교회는 부유하나 이웃과 사회를 돌아볼 여력이 없다. 그 미래는 끔찍할 따름이다. 이를 말씀은 상기시킨다.
오늘 내가 소유하고 사는 이 믿음이 얼마나 위대하고 찬란하며 값진 것인지. 많은 성도의 눈물과 탄식이 섞여있고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짓이겨져 있어 이로 단련된 신앙의 중추신경으로 오늘을 각성하며 사는 것이었으니, 들어갈 무덤에는 회개도 없다. 지옥에는 온통 후회와 탄식의 곡소리뿐이다. 여기서는 거부했어도 거기서는 거부할 수 없다. 여기서 거부한 것은 은혜이고 거기서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저주이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위치가 바뀐 것과 같다. 오늘이 값지고 아름다운 것은 오직 한 가지, 주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주님의 날 위한 중보기도는 창세전부터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하셨다. 이로써 내가 산다. 이는 내가 주의 언약 안에 머물 때에 유효하다.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8:9).” 나에게 더하신 새 언약이 있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6).” 내가 사는 것은 그 언약의 일꾼으로 산다. 그러할 때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이 있는데 마땅히 구해야 할 것보다 구하고 싶은 것을 구하고 사는 처지가 되어, 해야 하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을 바라는 것이었으니.
성경은 강조하신다. 성령이 도우시지 않으면 영영 어림도 없다. 이를 은연중에 내 속의 영이 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내가 바라는 것이 주께서 더하시고자 하는 게 아닌 것도 알고, 주가 바라시는 것은 육신을 입고 사는 나로서는 구하기를 회피한다는 사실이다. 여로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저의 행적을 살피면 그 속내가 훤히 나의 됨됨이와 다를 바 없는 것을 보게 된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여 거기서 살았다. 그런데 그가 보니 백성들이 절기 때면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니,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왕상 12:26).” 대책이 필요하였다. 행여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갔다가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 향할까 불안하였다. 그래서 저는 두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무리에게 “너희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였다(28). 그리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두었다. 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정한 절기를 두어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절기에 벧엘에서 제단을 쌓고 올라가서 분향하게 하였다(12:26-33). 나름은 가상한 노력이나 그 속에는 거짓뿐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으나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는 것이다. 저의 수고와 구함이 어찌 헛된가 하는 것을 돌아보면 오늘의 우리 사회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게 최우선이라 갖은 모략과 언동을 교회는 일삼아왔다.
이는 개인의 기도와도 다를 게 없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불을 본 듯 빤하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우리에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면, 곧 저의 간구가 여전하지 않으시면 우리로서는 저주에 놓인 것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간다. 그러므로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3).” 우리의 담대함, 내 스스로 얼마나 추하고 연약한지 잘 알면서도 주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성령이 대신 날 위해 간구하심이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나는 요즘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대신하시는 주의 은혜를 묵상한다. 저의 기도 안에서만 나는 온전하였다. 내가 무얼 애써 여로보함보다 더 열심으로 스스로 어찌 해보려하는 모든 것이 더욱 더 죄악 될 뿐임을 알았다. 특히 오늘 날 우리 교회들이 처한 현실이 정권의 종교적 탄압이니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니 하고 외부로 핑계를 돌릴 게 아니다. 암암리에 목사들은 다 알고 있었다. 저들끼리 직위를 사고팔고, 노회장이든 총회장 선거가 있을 때 세상 어떤 군상보다 비리와 온갖 술수가 난무한지를. 모이면 교인 숫자를 자랑하고, 교회 크기로 서열이 나뉘고는 하였던. 그러면서 쯧쯧 혀를 차면서도 그 앞에서는 모르는 척 서로가 다 묵인하고 지내온 비리가 오늘의 결과 아닌가. 나 같은 일개 변방의 같잖은 목사도 다 듣고 알고 있는 것을, 새삼 사회에 까발려지자 마치 숭고한 권위에 심각한 도전을 받는 것처럼… 낯 뜨거운 일이다. 성령의 탄식이 아니면 벌써 끝장났을 터.
하나님도 우리가 너무 죄악 되고 연약하다는 것을 잘 아신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5-6).” 물로 심판하신 후에도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8:21).” 아, 그런데도 교회들이 나서서 자중하고 회개할 줄 모르니,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 10:4).” 이와 같은 일에 성령이 우리에게 영의 일을 이해하게 하시지 않으면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방식과 노선으로 교회를 지키려 할 뿐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곧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돌아보아 우리 자신을 회개해야 한다. 교회가 무릎 꿇어야 한다. 그동안 과부의 돈을 삼키고 외식하던 것을.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막 12:40).” 사람에게 보이려고 교회를 일궈온 자화자찬을.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 18:11-12).”
이제 에스겔의 오늘 말씀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읽고 스스로 자중하며, 주의 자녀들로 주의 말씀 앞에 겸허할 따름이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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