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책벌로 내 원수를 그들에게 크게 갚으리라 내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즉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시니라
에스겔 25:17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시편 118:6
오직 주만 바라며 주를 의지하려는 의지가 주가 주신 것이다. 어느 것도 주의 것이 아닌 게 없다. 나의 하루는 세밀하신 주의 손길 중에 거한다. 그 가운데서 주의 이끄심이 느껴진다. 아침 일찍 같이 성경을 나누고 말씀을 놓고 사명을 돌아보는 일은 귀하다. 우리는 남다른 특권을 누린다. 저에게 말했다. 이처럼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하심이 귀하다. 그리 또 강조하였다.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이 자주 든다. 존 번연의 <순례자의 영성>을 새로 또 주문하였다. 자꾸 이런 책이, 읽힌다. 입맛에 따라 육신의 건강을 가늠할 수 있듯이 언제부턴가 나의 독법은 특이해졌다. 읽으면서도 ‘이런 내용’이 자꾸 ‘당긴다.’ 본래 한 작가의 책을 섭렵하는 습성이 있기는 해서 때론 저의 거듭되는 말이 지겨울 때도 있는데, 그게 이상하게 싫지가 않다. 가령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지난 7월에 읽었는데 주문한 책을 기다리며 다시 읽었다. 밑줄 긋고 메모한 기억이 나는데 다시 또 밑줄을 그으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나는 저에게 이를 우리의 특혜라고 강조하였다. 그럴 수 있고, 그래지는 이상한 버릇이다. 나야말로 ‘종교서적’에 대해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처럼 싫어하지 않았던가. 늘 또 똑같은 말처럼 거기에 거듭되는 성경구절의 인용이 그처럼 싫었는데, 우리는 체질이 바뀌고 언어의 세계와 체계가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온통 같은 내용인 듯 한데 메모가 이어진다.
우리의 일은 꼴을 먹이는 일인데 이는 마치 주방장과 같다. 신선한 재료로 종일 음식을 준비한다. 목회자란 그렇듯 골방에 앉아 말씀을 되새김질하고 주의 말씀을 다루며 가까이 하다 전해야 하는 대상을 보내시면 그리 전하여주는 사람이라고 저에게 말했다. 젊을 때 아직 여러 생각이 많을 때 말씀 앞에만 있는 것이 왠지 답답하고 무용지물 같은 느낌도 들기는 하겠으나, 주가 이끄시지 않으면 그도 할 수 없지만 우리 곁에 보내시는 한 영혼도 그러하였다. 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 함께 하기에 힘에 부치지 않을 만큼 주께서 이끄시는 것을 또한 느낀다. 다 저마다의 은사와 능력이 다르겠으나 누구를 부러워하거나 따라 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주를 힘입어 할 일이다. 내가 주관할 일이 아니다. 나는 저가 저의 젊음으로 무엇을 도모하려 하기보다 말씀으로 말씀에 더욱 가까이 하기를 당부하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준비가 되면 주께서 말씀으로 귀히 저를 들어 쓰실 것임을 확신하였다. 아직 서른 중후반의 나이에 묵묵히 주의 길을 가고자 하는 그의 심성이 고마웠다. 우리에게는 뿌리가 중요하다.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 11:18).” 말씀에 뿌리를 두지 못하면, 목회자가 광장으로 몰려다니게 돼 있다. 우린 결코 선동가가 아니다. 나서 선봉에 서야 하는 역할이 아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계 20:4).” 조금은 일반인과 다른 조용하고 은밀한 역할이 필요하다. 책을 잘 안 읽어요, 할 때 뭐라 한 마디 했다. 싫든 좋든 성경은 책이다. 이를 다루는 말들도 책이다. 소리로 듣는 것과 언어로 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사랑하시라. 습관들이기 나름이다. 나야말로 지진아에 부산을 떨며 진득이 앉아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싸돌아다니기 좋아하고 누구와 어울려 이야기하기 좋아하지, 읽고 묵상하고 깊이 사색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종교서적에 대해서는 병적으로 거부하던 위인이다. 전에 누구에게도 그런 권면을 한 적이 있다. 자기는 평생 책을 한 권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고, 성경도 늘 설교로 듣지 자기가 읽은 적이 없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면서 전문서적이나 자기 일에 관련된 책은 잘도 읽는다! 나는 저에게 늙음과 병듦을 대비하라고 일렀다. 특히 장애가 있다는 것은 일반인보다 일찍 퇴화하여 혼자 거동 못할 처지가 되는 시기가 빠르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믿는 자로 이를 대비한다는 게 무얼까? 그러니 적당히 벌었으니 더는 돈돈거리지 말고, 무던히 말씀 앞에 앉는 훈련을 하라고 일렀다. 그런데 그게 쉽나? 더 늙기 전에 직업을 바꾸고 다른 일에 도전해보겠다며 저는 오늘도 밖으로 나다니느라, 그야말로 가만히 말씀 볼 시간이 없다.
말씀 한 구절이 깊은데 건성으로 읽거나 듣고 나면, 들었던 것이라 안다고 여기고,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더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루이스의 표현대로 하면 이런 독자는 ‘나쁜 독자’다. 더 심한 경우 읽지도 않고 듣기만 했는데 자신은 읽은 것으로 간주해버린다. 그래서 저에게 말씀이란 누가 들려주는 ‘~그렇더라’는 정도일 뿐이다. 자신이 음미하고 숙원할 능력이 없다. 나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에 대해 새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왜 하필이면 말씀이셨을까? 언어란 얼마나 모호하고 오해의 소지가 많고 각 나라마다, 사람마다 사고의 체계에 따라 이해의 간격이 모호한가? 왜 하나님은 이런 불확실성을 자처하고 모호함에 자신을 맡기신 것일까? 어떤 공식이나 물체가 아니라, 언어야말로 무궁한 세계다. 한정된 세계가 아니다. 가령 한 단어에는 최소한 사전적인 의미와 지시적인 의미와 함축적인 의미가 다 담긴다. 그 뜻은 엄연히 다르다. ‘주먹이 운다.’ 할 때 '주먹'이 갖는 사전적인 의미로는 저 문맥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럼 주먹이 지시하는, ‘힘’이라는 의미로만 해석을 단정지을 수 있겠나? 주먹이라는 명사와 운다는 동사가 하나의 의미로 연결될 때 그 뜻과 의미는 여러가지로 갈린다. 그래서 나는 각 교단이 나뉘고 목사마다 그 주신 은혜의 분량에 따라 의미의 깊이와 넓이가 다르다고 본다. 성경의 언어는 사탄의 공격도 끝이 없어서 내 임의로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하여 상식으로 도출하려하다간, 오늘 날 우리 사회의 변이된 목회자들의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학자인지, 철학자인지, 날카로운 비평가인지, 몽상가인지, 누가 분명 목사라는 신분으로 토론에 나가 사람들의 상식을 달래고 있기 일쑤이니,.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이를 저들의 어떻게 읽고 이해할까? 주님이 자살을 염두에 두셨는가? 십자가는 자해의 현장인가?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 특히 아침에 나는 젊은 목회자와 말씀을 나누는 일이 여느 성경공부와 다르다. 나는 일방적일 수 없고 단일적이지 못하다. 같이 하는 그 시간이 훗날 저의 목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나는 종종 두려움이 앞선다. 저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 나는 주께 은밀히 기도한다. 해야 할 말을, 반드시 해야 할 말만을 내게 주소서. 들어야 할 말과 그 말에 적합한 이해를 주소서. 섣부른 나의 설명이 참견이 되지 않게 하시고, 말씀에 대한 이해가 강요가 되지 않게 하소서. 조금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설렌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 6:9).” 우리가 가진 이 복음은 다시는 사망이 주장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철학자도 몽상가도 심지어 나름의 도인도 아니다. 마치 내가 아는 것처럼 굴면 스스로 선봉에 서 홍해를 가르려 드는 모세의 아류 뿐이다. 자중하자. 주어진 삶이, 사역이 내게 가장 적합하다. 도태된 듯하나 홀로 떨어져 있을 때 말씀과 깊은 교제가 이루어진다. 하다못해 책읽기도 혼자 떨어져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같이 지껄이면서 무슨 책을 읽겠나? 하물며 주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일은,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처음이고 나중이신, 영원부터 영원까지이신 그분의 말에 나의 이해를 쏟는 일이란 얼마나 무모하면서도 황홀한 일인지 모른다. 성령이 함께 하실 일이다. 모든 심판은 주의 것이다. “분노의 책벌로 내 원수를 그들에게 크게 갚으리라 내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은즉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시니라(겔 25:17).” 에돔에 대해, 블레셋과 애굽, 그 어떤 이방 족속에 대해 우리가 그렇게 공격적일 필요는 없어진다. 저들도 하나님이 쓰셨고 적당한 때에 두시고 거두셨다. 오직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 118:6).” 그러니 너무 그렇게 사람보고 연연할 거 없다. 사회가 어떻든지, 정권이 어떻든지, 더욱이 목사가 일일이 나서서 다툴 일이 아니다. 그럴 거였으면 주님도 주의 제자들과 함께 손에 죽창을 들고 밤길을 누비며 저들과 맞서야 하셨다. 주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사 48:12).” 그러니 뭘 더?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계 17-19).” 오늘 날 이와 같은 현상은 한 줌의 시간도 못 된다. 우리가 연연하여 갑론을박하는 데 끼어 목사가 불려나가 썰을 풀 깜도 없다. 오직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시 118:7).” 주가 하신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8-9).” 이를 나는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17).” 그리하여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19).” 묵묵히 우리가 할 일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8-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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