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들이 주의 증거들을 알리이다

전봉석 2020. 9. 20. 06:14

 

 

네가 무너지는 그날에 섬들이 진동할 것임이여 바다 가운데의 섬들이 네 결국을 보고 놀라리로다 하리라

에스겔 26:18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그들이 주의 증거들을 알리이다

시편 119:79

 

 

노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관조적인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는 게 고달파서 죽는 날까지 그 늪을 허우적거리는 인생도 있다. 문득 노점에 앉아 사과를 파는 노인을 보고, 굽은 허리로 종이박스를 몇 주워 힘겨운 걸음을 옮기는 이를 보다, 그럼에도 나는 저들의 깊은 눈을 바라보았다. 약간의 습관 같은 것이다. 일찍이 나는 얼른 노인이 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저들의 시선 때문이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초점 없는 어느 지점, 시선이 머무는 곳에 지나온 생이 있는 것일까? 곧 다가올 죽음이 있는 것일까? 어릴 적 절간 마루에서 나의 늙으신 조모가 그렇게 먼 발치께를 하염없이 바라고는 하였는데, 어린 나는 그곳에 무엇이 있나? 하고 번갈아가며 그 시선을 좇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 뭘 봐? 하고 물어도 보긴 뭘 봐? 하고 되레 묻곤 하였던. 좀 어이없는 연관이지만 나는 시편 119편을 한 번에 이어 웅얼거리듯 읽다보면 시선을 잃는다. 아니, 한 곳을 가만히 응시하는 노인의 눈길 같이 된다. 나의 느린 독법으로 웅얼거리듯 읽다 그 시선에 잠깐씩 머물곤 하면 금세 한 시간이 지났다. 저만치 나의 시선 거기에는 말씀이 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03).”

 

가끔 웅얼거리듯 소리 내어 소곤거리며 읽으면 입안에 정말 사탕을 물고 있는 것처럼 달다. 그러다 어느 대목에서 눈물이 핑, 돌기도 하면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 어쩌면 나는 그래서 일찍이 뭣 모르고 노인이 되고 싶었던가보다. 실은 지금도 나이답지 않게 노인 대우를 받는 게 싫지 않다. 종종 엘리베이터 앞에서 누가 어르신, 이쪽으로 오세요! 한다거나 병원에 갔을 때 나이어린 간호사가 아버님, 혈압 좀 잴게요! 하면 느낌이 좋다. 언제는 아내와 같이 있는데, 어린 간호사가 아내에게 아버님 검사 다 끝나셨어요! 하자 아내는 질겁했다. 머리가 하얗고 표정이 노인 같다며 늘 타박이지만 나는 그것이 싫지 않다. 노인이 되면 더는 물욕이 없고 욕망에 시달리지 않으며 들어도, 가져도, 보아도 더 취하려고 하는 욕심이 저절로 없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똑같거나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더할 때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15-16).” 그러할 수 있는 마음은 분명히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야 가질 수 있는, 빈틈에 스미는 빛줄기 같다. 반드시 세상은 멸망한다. 두로와 같이, “네가 무너지는 그날에 섬들이 진동할 것임이여 바다 가운데의 섬들이 네 결국을 보고 놀라리로다 하리라(26:18).” 이를 보고 놀라고 두려워할 수 있는 영혼이 귀하다. 정작 두려움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면 살아도 산 것이 헛것이라.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은 변함없고 그의 보호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은 노인이 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능력이다. 믿음이 자라 나이 든 결과이다.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4:11-12).” 그렇게 늙고 싶다. 곧 오늘의 말씀에서처럼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그들이 주의 증거들을 알리이다(119:79).” 이는 결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닐 터, 그러므로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116).” 살아온 날의 무게이다. 영혼의 무게는 이에 비례한다. 믿음으로 구원 받고 바로 끝이 아닌 것처럼 그때가 시작이고 이제 한참 후에 마주할 시선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 이와 같은 진리에 시선을 머물고 있을 수 있는 게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달에 한 번 부모님이 오실 때면 나는 저들이 한 뼘은 늙어가는 것에 놀란다. 말투며 표정이며 이런저런 것에 말을 더하실 때의 목소리부터도 달라진 것을 느낀다. 이를 애석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어떤 부러움에 더 가깝다. 일찍부터 그냥 그렇게 노인으로 살고 싶은 나의 욕심은 이제 겨우 오십 중반에 노인 대우를 받는 것이 싫지 않다.

 

나의 시선은 언제쯤 건성으로가 아니라 온전히 더 깊게 주를 바라볼 수 있을까?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11:7-9).” 나만 사람 소발의 입을 빌어 주의 크심을 바라보게 된다. 이는 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나는 과연 얼마쯤 더 늙어야 진짜 노인이 되어 저의 시선으로 주를 바라볼 수 있을까? 나의 젊은 날 내가 그처럼 증명하고 찾고 싶었던 주의 사랑이 아니라, 본래 그 자리, 그 모습, 그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에 대하여.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5:9-11).” 나는 나의 부모의 늙음을 두고 저들이 걸어왔을 험악했던 인생을 가늠하다 경이롭다. 그땐 그랬지, 하는 지난 날의 무게는 아무나 선뜻 헤아릴 수 없는 깊이다. 사람마다 모두 응어리를 안고 살고, 이것이 누구에게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누구에게는 긍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저마다 상처 없는 인생이 어디 있었겠나? 지나오면 보이는 게 응어리인데.

 

전에 친구 모친상으로 문상을 갔었다. 나보다 열 살은 위엔 큰 누님이 오랜만에 보는 내 앞에 앉아 눈물 찍으며 말했다. 동생 친구 목사님이니까 이해할까? 나는 엄마가 숨이 넘어갈 때까지 물었다! 엄만 왜 내가 국민학교 다녀오면 한 번도 따뜻하게 안아준 적이 없어? 왜 그렇게 늘 화가 나 있었어? 하고 계속 물어도 답이 없다가 그냥 가시더라? 난 지금도 그 대답을 듣지 못해서 그게 슬퍼! 하는 저의 넋두리에 눈길을 피했다. 나이 예순을 넘겨 다 늙은 딸이 더 늙어서 죽어가는 엄마에게 묻고 싶은 것은 그것이었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의 늙음마저도 공평하지가 않구나. 아무나 노인의 시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구나. 누구나 살면서 맺힌 응어리나 상처가 있는데 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썩어서 늪지대를 형성하여 허우적거리며 평생을 살거나 콘크리트보다 단단하여져 그 터 위에 집을 짓고 건실히 사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우리에게 더하신 날을 회피하며 살 수 있겠나? 이를 단단히 딛고 살거나 늘 꼴깍거리며 묻혀 살거나의 차이였다.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9:19-20).”

 

노인이 된다는 것은 싫든 좋든 주 앞에 더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다. 누가 주를 소환하겠나? 우리 모두가 갈 뿐이다. 예외는 없다. 늙음이란 가차 없고, 노인이 된다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누구에게는 설레는 일이고 누구에게는 두려운 일이다. “보라 이런 것들은 그의 행사의 단편일 뿐이요 우리가 그에게서 들은 것도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니 그의 큰 능력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헤아리랴(26:14).” 살아서 아무리 젊은 날에 기를 쓰고 다 아는 척 하며 산다 해도,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119:24).” 나이가 들면서 나는 좋은 게 그 증거들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이다. 나의 부친의 걸음이 그러하고 나의 모친의 기력이 그러하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지만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는 결코 모든 인생이 그런 게 아니다. 속사람이 없는 사람이 허다하다. 저들은 영혼을 돌보지 않는다. 의탁할 줄도 모른다. 죽어가는 노인의 목을 안고 어릴 적 서러웠던 기억을 더듬으며 묻고 있었을, 이제는 다 늙은 딸아이의 모습을 상상하면 끔찍하다.

 

그러므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119:37).” 나는 주께 아뢴다.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43).” 나는 살아서 이제 남은 생이 말씀으로만 말을 담고 사는 입이었으면 좋겠다. 이에 기도하기를,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49).” 왜냐하면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50).” 조금 더 젊을 때, 어릴 적에는 몰랐으나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71).” 그러므로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77).” 이제 어떠하든,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144).” 고로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175).” 여전히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17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