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34:15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1
주께서 이루신다.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겔 34:16).” 그렇게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5).” 하시는 말씀 앞에서 안도한다. 말씀을 증거하고 그 말씀을 되새기며 그것으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게는 신기할 정도였다. 늘 말이 앞서는 자리라서 나는 말 값을 염려하고는 한다. 기껏 전하였는데 도리어 내가 지키지 못할까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바울이 주의하였던 바를 되새기게 된다.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때론 그 자체로 귀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대화가 어려운 까닭은 그 관심이 온통 돈을 버는 일에 기울었으니, 예배가 끝나고 앉아 서로가 나눌 이야기는 아닌듯한데 뭐라 할 수도 없고, 나는 말을 잃고 시선도 잃는다. 사는 데 따른 이런저런 방법과 구구한 이야기들이 때로는 진리를 좇는데 훼방이 된다. 먹고 사는 일이 급선무라. 우선은 그것이 정신을 파는 일이었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슬그머니 나는 자리를 피한다.
문제는 우리의 관심인 것 같다. 어디서 얼마를 벌며 일하느냐, 하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뭘 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 1:11).” 나의 역할은 그게 다였다. 전하였고 권했는데 미치지 못하는 말에 대하여는 주께 의뢰함뿐이다. 주가 저들을 다루시고 다투시고 어루만지실 것이다. 거기서 나는 주께서 친히 나를 위해 하신 일들을 묵상하게 된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4-16).” 내가 저들을 어쩔 것인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오늘 말씀이 귀하다. 그리하여 에스겔을 통하여 전하시는 말씀도 그런 맥락이다.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4:31).” 주께서 다루시고 돌보신다는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17).” 그런데 “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18).”
이는 어쩌면 사느라 너무 사는 데 연연하여서 그렇다. 늘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고 바라는 것일 텐데,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 좋다, 그렇다치면 기껏 저가 더하는 것이 결국은 죽음이다. 그러나 저가 죽이는 것이 육이면, 죄 때문인 것이고 이를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이다. 이를 이기신 것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죽음이 온다 해도 이는 끝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은 주의 아들 안에 있다. 이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그 생명은 전가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오늘을 하루 더 연장하여 살게 하시는 이유였다. 슬그머니 물러나 앉아 어디에 얼마를 투자하고, 그것을 어떻게 운용하여 돈을 불리고 장래를 대비할 것인지에 대하여… 그런 대화가 오가는 데서 내가 할 말은 없었다. 누가 어떻고, 어디서 얼마를 벌고 그러느라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소식이 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은 슬픈 일이다. 누가 전화를 했을 때도 저의 실없는 소리에 전에처럼 길게 말을 섞을 게 없어 난처해하고는 하는데 이게 참 슬프다.
서로의 관심이 다른 것이다. 전혀 다른 세상을 구사하고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그렇게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는 일은 시끄럽고 어지러운 일이다. 공사장의 소음은 당연한 것처럼, 나는 감히 시편 29편의 ‘여호와의 소리’를 그리 비유하였다. 이는 성화구원을 이뤄가는 내내 끊이지 않는, 삼위 하나님의 간구하는 소리로도 연관지었다. 곧 오늘 나의 기도가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나의 요구들에는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되는 바람이 있고 이는 우상숭배와 다르지가 않다. 그때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시 29:3-4).” 우렛소리가 조용한가? 물소리가 아무리 요란하다 해도 그 위에 위엄이 있는 소리의 힘이다. 이 힘은 우리에게 더하시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1).” 나는 이 벅차고 복된 소식을 전하였는데, 들리는 게 없었는지 도로 사는 이야기에 전전긍긍하며 어디에 얼마를 투자하고 뭐가 어떤데, 누구와 같이 동업을 계획하고 하는 식의 말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겔 34:5-6).” 오늘 말씀이 그리 읽힌다.
예수님의 탄식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 6:34).” 내 안에 이는 이와 같은 안타까움이 헛된 게 아닐 것이다. 누구를 생각하다 또 예배 후 서로들 둘러앉아 그런저런 대화 내용이 그러한 것에 나는 할 말을 더하지 못한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주 안에 살게 하시려고, 더욱 주를 사모하게 하시려고, 내 안에 그와 같은 불편함도 더하시는 모양이다. 다만 주께서 인정하시는 일에 전념할 수 있기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63:6).” 우리가 그렇지 못함을 아심으로 주께서 그 일을 담당하게 하셨다. 나의 기도가 늘 찬송과 감사로 채워지지 못하는 데 대하여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막 8:12).”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주께서 제물로 드려지심으로 우리가 자유하게 되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2-14).” 이를 앎으로 주의 뜻을 바란다. 장래의 노염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신 일이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 1:10).” 누구에 대해, 어떤 사안에 대해 시시콜콜 글로 옮기려다 그만둔다. 그리고 이처럼 말씀으로 그 답답함을 달랜다. 전하는 일과 이를 알게 하여 함께 그 벅찬 감동으로 찬양하는 데까지 이르기는 나의 수고나 애씀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즉시로 성령을 부어주시지는 않았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9).” 이는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2-33).” 주가 높이심을 받을 때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진다. 말씀이 전하여지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소망하고 바라며 그와 함께 살고자 하는 원리도 같겠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더욱 선명해진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나는 다만 주를 의뢰할 따름이다. 아니면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2).” 그러니 우리의 온통 관심은 무엇인가?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34:24).” 또한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25).”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0) | 2020.09.30 |
---|---|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0) | 2020.09.29 |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0) | 2020.09.27 |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 (0) | 2020.09.26 |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0) | 2020.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