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 성읍들을 무너뜨리며 네가 황폐하게 되리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에스겔 35:4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128:1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깊다.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통회하는 정도에서 은혜의 깊이와 풍성하심을 안다. 모두가 찬란했던 문화로 자기 자랑에 눌리는 것을 본다. 오늘은 에돔에 대한 예언이다. 야곱의 형 에서의 땅이다. 늘 이스라엘을 수탈하였는데 바벨론의 침공 때 더했고, 도망쳐 나온 사람들을 잡아 바벨론에 넘기기도 하였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빈정거림이었다. 꼴좋다, 하는 심보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늘 이 땅의 교회를 조롱하는 자들을 돌아보게 한다. 유난히 교회 다니는 사람을 멸시하고 싫어하고 아니꼽게 여기는 무리가 있다. 에서는 본래 명분에 침착하였고, 축복을 갈망하였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망각했다. 에돔에게는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피해의식과 질투가 서려 있었다. 저들을 향한 오늘 본문의 말씀은 현재의 우리 사회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주께서 이를 경계하신다. “내가 네 성읍들을 무너뜨리며 네가 황폐하게 되리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겔 35:4).” 비로소 저들의 악함이 주의 사랑의 깊이를 측량하게 한다. 마침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깊다는 말씀을 여러 번 묵상하게 되는 하루였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내 안의 죄의 정도를 알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도를 알 수도 없다. 죄는 상대적으로 사랑을 돋보이게 한다. 바로의 악함이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나게 한 것과 같다. 무한하고 깨달을 수 없는 두 세계다. 사탄보다 죄가 더 나쁘다. 죄가 무언가?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 7:13).” 죄로 심히 죄가 되게 하는 것이 계명이다. 말씀 앞에 서면 나의 죄악 됨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아침에 친구 전도사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며 가끔씩 지난날을 돌아보곤 하는데, 내 안의 죄가 참 깊다. 차마 말로다 못하는 부분까지도 한숨이 진다. 은혜가 아니면 어찌 살 수가 없다. 선하게 여기는 것에서 나는 죽음에 이르는 것이었다. 나름 열심을 다해 최선의 노력으로 산다고 하였던 몇몇 올곧았다 여기는 사람들의 자살이 나를 돌아보게 하였다. 저들은 끝내 자신들의 선으로 말미암아 죽었다. 이름을 거명하기는 뭐하나 평생을 인권변호사로, 사회운동가로, 노동자와 사회적약자들의 편에 서서 대통령이 되고, 시장이 되고, 정당의 오랜 대표가 되어 살았던 이들의 선함이다. 선한 것이 사망이 되었겠나? 그럴 수 없으나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저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와 같은 의, 선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든다. 내가 어찌 하려는 선이다.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다.’
죄의 기원과 출처를 알 수 없고 그 정도와 깊이도 알 수 없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정도는 내가 끔찍하게 여기는 정도 그 이상의 정도이다. 나의 이해와 지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죄는 마귀보다 나쁘다. 하나님의 사랑의 너비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다 알 수 없는 것처럼 내 안에 있어서 내 안에서 나오는 죄의 농도를 나는 도저히 짐작도 할 수 없다. 다윗은 죄의 정도를 알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그러할 때 하나님의 노하심의 정도를 알 수 없다고 모세는 강조하였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90:11).” 다만 죄는 악화시킬 뿐이고, 주의 긍휼하심은 이를 모두 덮으실 뿐이다. 죄에는 작은 죄 큰 죄가 없다. 가장 작은 죄가 그 영혼을 지옥에 떨어뜨릴 수 있고, 가장 큰 죄가 주의 은혜로 없이 여김을 받을 수 있다. 아무튼 지옥은 이 땅에서 받는 모든 재앙보다 심하다. 죄의 특징은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의 영혼을 죽인다. “우리가 우리의 조상들처럼 범죄하여 사악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106:6).” 그렇게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7).” 자신들이 여전하고 그의 자식들도 이어서 죄악 중에 거한다. 가령 오는 아이들 가운데 그 부모의 무분별한 삶의 행태가 고스란히 자식들의 생을 좀 먹고 있다. 돈으로 모든 삶의 가치와 기준을 삼으려니 자식들도 돈 되는 일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성적으로 문란한 부모의 외도가 자식들의 안이한 성인식을 조장한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때 그 자녀들의 삶도 어쩔 수가 없다. 죄는 전염도가 높다. 이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주의 강권하신 은혜밖에 없다. 죄는 하나님을 노하게 하고, 성령을 슬프게 하며, 은혜를 약화시킨다. 죄는 기도를 훼방하고, 믿음을 저버리게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철저하게 몰이해시킨다. 죄의 정도를 알 수 없듯이 지옥의 실체도 알 길이 없다. 주의 사랑의 정도를 알 수 없듯이 천국의 본질도 알 수가 없다. 막연하게 느끼고 맛보는 정도가 고작이라, 마귀의 간계는 언제든 베드로를 배신하게 하고(눅 22: 13), 욥을 시험한다(욥 1장). 죄는 하나님이 경작하시는 밭을 짒밟고, 부어주시는 은혜의 수로를 발로 더럽힌다. “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겔 34:18-19).” 어제 아침에 묵상했던 말씀이 종일토록 내 안의 죄의 정도와 씨름하게 하였다. 그리고 죄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죄의식을 불어넣는다.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옛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들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사 64:4).”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를 또 이겨내고, 그럴 수 있기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은 깊고 풍성하시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9:5).” 죄는 남들까지 물들이듯이 은혜는 대대로 이어져 흐른다.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 아니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겔 16:60).” 나는 종종 고백하건대 어릴 적, 뭘 안다고 내가 그렇게 죄인 됨을 고백하며 눈물로 세례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같이 나란히 세례를 받았던 예닐곱 명의 또래들도 덩달아 며칠 전부터 금식하고 서원하며 죄를 탄식하고 회개하였다. 어쩜 그렇게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세례교인 되는 것에 감격스러워하였는지 모른다. 그 어렸을 때에 주가 세우신 언약은 나를 잊고 살 때도 주께서는 그 언약을 세우셨다.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 내가 여호와인 줄 네가 알게 하리니(62).” 나는 종종 나의 날들을 돌아보며 누구에게 고백하다보면 말하는 것들로 내가 더 이해할 길이 없는 주의 은혜에 사로잡힌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36:25-27).”
나는 젊은 친구 전도사와 성경공부를 하며 저의 젊은 날들을 부러워하며 격려하기도 한다. 일찍이 말씀에 붙들려서 말씀으로만 바로 서서 말씀 가운데 올곧은 목회자로 살아가기를. 그리하여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28).” 그러할 때,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 데에서 구원하고 곡식이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닥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나무의 열매와 밭의 소산을 풍성하게 하여 너희가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여러 나라에게 당하지 아니하게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좋지 못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스스로 밉게 보리라(29-31).” 항상 깨어 있는 목회자가 되시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로 말미암아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32).” 이는 스스로 부족함과 연약함, 허물의 정도를 느끼면 느끼는 만큼 더해지는 은혜였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하게 하는 날에 성읍들에 사람이 거주하게 하며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할 것인즉,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폐하게 보이던 그 황폐한 땅이 장차 경작이 될지라(33-34).” 우리의 혜안은 세상을 통해 지옥을 보지만 천국도 본다.
참 성경의 세계는 놀랍고 하나님의 은혜는 이해할 길이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미덕으로 보시고, 그저 생각 정도로나 했을 법한 작은 죄를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때가 있다.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그저 뻔뻔하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죄인이라 송구하고 죄스러울 뿐인데도 주의 사랑 안에 거함이다. 내가 얼마나 죄인임을 알 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주의 사랑은 죄보다 깊고 은혜보다 은혜로우시며, 나의 죄악 됨 보다 크고 넓으시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그러니 더욱 더 말씀 붙들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오늘 시편의 말씀이 남은 나의 생을 축약하고 계시는 것 같다. 그러할 때,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2).” 이는 삶으로 나타나서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3).” 오늘 나의 복됨이 모두 주의 은혜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4).”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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