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다니엘 4:2-3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시편 145:8
돌이 복음을 전하게 하고 들풀이 찬양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이방나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의 입을 열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놀라운 일을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참으로 크도다 그의 이적이여, 참으로 능하도다 그의 놀라운 일이여,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단 4:2-3).” 이는 믿음 좋은 어느 성도의 고백이 아니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찬양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37).” 이와 같은 찬송이 ‘모두’의 것이나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 그러할 수 있지만 ‘다’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때를 따라 그의 쓰심은 무궁하셔서 가룟인 유다나 애굽의 바로처럼 그 일에 적합하게 사용하시기도 한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2).” 여기서 ‘그들’ 중에 ‘그들’이 따로 있고 ‘그들’ 중에 들지 못하는 ‘그들’도 있는 것이다.
말씀의 정중하심 앞에 오래 머물고 그 문맥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지혜는 귀하다.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알려질 수 없는 비밀이 있다. 곧 이는 구별되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6:37).” 여기서 ‘다’가 ‘다’가 아닌, 그리스도에게 올 수 있는 자만을 일컫는 특정한 '다'의 의미다. 이와 같은 어법의 의미로, 성경은 다양한 표현으로 그 뜻을 더욱 강조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롬 11:26).” 여기에서 ‘온 이스라엘’이 전체의 이스라엘을 의미하기보다 제한된 의미로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이를 명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부분이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9:6-8).” 따로 구별되어진 사람들로서의 ‘다’이고, 주를 경외함으로 주의 백성에 드는 사람들로서의 ‘온 이스라엘’이다. 이처럼 ‘그들’이 다 ‘그들’이 아닌 것이다.
설령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올렸다고 하여 저의 고백이 믿음의 고백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의 종교를 화합하고,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의 신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요 12:32).” 이럴 때 ‘모든 사람’도 전부 다, ‘아무나’를 일컫는 '모든 사람'의 의미가 아니다. 이를 그저 문맥적으로만 해석해도 모두가 하나, 우리는 모두 한 하나님-신의 자녀인 것을 강조하는 따위의 헛소리들을 경계할 수 있다. 이는 돌의 입을 열어 복음을 전하게 하실 수 있고, 들꽃으로도 찬송을 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가령 다음 구절에 나타나는 두 가지의 ‘모든’는 별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할 때, 서로 다른 사람 '모든'이다. 앞의 ‘모든’은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을 일컫지만 뒤에 나오는 ‘모든’은 특별히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도록 약속된 사람들로 한정된다. 곧 그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 따로 구분된 '모든'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의 칭송과 찬양에 놀랍다. 그러나 저의 고백은 주의 자녀로서의 고백과는 다르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시 145:8).”
이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믿어 구원에 이르는 고백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즉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이를 알 수 있는 자는 한정되었고 제한되었음을 엄연히 강조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시나, 모든 사람이 하나님으로 알지는 못한다. 구별된 자들의 권세는 엄연히 다르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또한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 2:8-9).” 이와 같은 권능은 부여될 수 있는 자가 따로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분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을 구별하시었다. 그것은 말씀이 어떻게 보이느냐, 주어진 상황이 무엇을 들려주느냐, 하는 데서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이다. “또 주께서 내 원수들에게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을 내가 끊어 버리게 하셨나이다(18:40).” 앞서 말했듯이 가룟인 유다는 그러한 목적으로 지음 받았다. 저의 용도는 거기까지로 주께서 십자가를 지실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곧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즉 그들이 따로 있음을 명백히 한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우리의 동정과 값싼 온정으로 ‘모두’를 혼동하고 ‘그들’을 혼용할 때가 있다. 어제 뉴스에서 감리교 어느 젊은 목사는 <큐어문화축전>에 초대되어 ‘사회적약자’로 통칭, ‘성소수자’를 위해 특별히 기도를 하며 축복하였다. 저는 언론에 말하길 하나님은 모든,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서시고 위로하셨다며 저들을 축복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나는 저와 같은 논란 자체가 소모적이라 생각하여 ‘너는 어느 쪽이냐?’ 하고 묻는 문제에 응대 자체를 꺼리는데, 저의 변론을 들으면서 저가 아는 성경과 내가 아는 성경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문제 삼은 감리교회는 2년 직분정지처분을 내렸는데, 같이 참석한 장로교나 개신교회의 묵인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두’의 하나님이시고 다들 통틀어 ‘그들’의 하나님이신가? 마약을 파는 판매상도 하나님을 찾고, 성매매를 하는 자도 하나님을 찾고, 살인과 전쟁을 일삼는 자들도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니 우리 하나님이 저들이 찾는 그 하나님이 맞는가?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할 때의 ‘그들’은 말 그대로 ‘아무나’를 일컫는 ‘그들’이 아니다. 곧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전에 모 기업 NGO 단체에 취업을 한 아이가 인사를 왔다. 저는 가난한 나라에 구제하고 봉사하며 후원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회적기업에서 일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러면서 우리의 하나님이 모두의 하나님인 것처럼, 거기에는 인종도 종교도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를 펼치기도 하였다. 특히 요즘은 동성애에 대해 마치 다들 성소수자에 대해 너그럽게 언급해야지 뭐라 생각을 달면 종교적인, 편향된, 옹졸한 광신자로 매도하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 17:2).” 여기서의 ‘모든’은 앞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으로 한정된다. 그렇게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6).” 곧 그들의 세상이 따로 있고, 그 ‘세상 중에서’ 구별되는 ‘그들’이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해 비셨다. ‘그들’ 때문에 오셨고, 죽으셨다. ‘그들’을 사랑하신 것이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바로 ‘내게 주신 자들’로서의 ‘그들’이다(9). 그래서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10).”
마치 아무나, 모두, 다, 이 말씀을 그렇게 받아버리면 하나님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다원주의적인 신이 되어, 이를 더 확대하면 돌에도 나무에도 하나님이 산다는 식의 궤변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예수님은 더욱 간절하게 기도하셨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 분명히 ‘그들’과 세상은 다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24).” 결국 우리가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는 ‘내게 주신 자’들의 세상이다. 그렇게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에게 보게 하’실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느부갓네살 왕의 찬양과 칭송을 들으며, 돌도 춤추게 하고 들꽃들도 노래하게 하실 수 있는 분께서 얼마든지, 하물며 바벨론의 왕의 입으로도 찬송을 하게 하실 수 있다는 데서 나의 묵상은 어제 저녁에 뉴스와 중첩되어, 어느 목사의 보편적인 진리(?)를 불편해하였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오늘 말씀은 시편을 빗대어 찬송이 찬송되는 것을 보여주신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 145:9).” 여기서 '모든'은 보편이 아닌 구별된, '나'의 고백으로 구분된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1).” 그렇게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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