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다니엘 6:23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편 147:10-11
아침에 말씀을 보내어 나를 녹이신다. 내 안에 성령의 바람을 불게 하시고,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신다.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시 147:18).” 오늘 말씀은 다 알면서 새삼 기이하게 다가온다. 예순두 살에 왕이 된 다리오는 다니엘을 총리로 두고 총애하였다. 그런데 다른 고관들이 이를 시기하였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다른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났다. 저가 전국을 다스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자 저의 허물을 찾아 고발하고자 했으나 아무 근거나 허물도 찾지 못하였다. ‘저는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었다. 결국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않으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 하고 저들은 다윗의 기도 생활을 주목했다. 그리고 모의하여 다리오에게 건의하였다. “나라의 모든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법률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나이다.” 하니 늙은 왕은 무슨 일인가, 하였을 테고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도 예배할 수 없게 하고, 만일 이를 어기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하자며 왕의 허영심을 자극했다. 그만큼 자신을 높여 경배하자는데, 다리오 왕이 싫을 리 없었다. 한 번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히면 메대와 바사의 법은 이를 고칠 수 없는 규례가 있었다. 따라서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고 못을 박았다. 이에 다리오 왕은 별 생각 없이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금령을 내렸다.
다니엘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왕이 내린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저는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10).” 결국 저들의 작당에 걸려든 셈이다.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발견하고, 여러 대신들이 왕의 금령을 들어 저를 사자 굴에 던져 넣으라 청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로 말미암아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쓰며 그를 건져내려고 힘을 다하다가 해가 질 때에 이르렀더라(14).” 하물며 사람도 사람이 정한 법령에 따라 이처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를 빌미로 “그 무리들이 또 모여 왕에게로 나아와서 왕께 말하되 왕이여 메대와 바사의 규례를 아시거니와 왕께서 세우신 금령과 법도는 고치지 못할 것이니이다(15).” 하고 다그쳤다. 어쩔 수 없이 왕이 명령하였고, 다니엘을 끌어다 사자 굴에 던져 넣었다. 그때도 다리오는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는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다(16). 그렇게 돌을 굴려 굴 어귀를 막으니 왕이 그의 도장과 귀족들의 도장으로 굴을 봉하였다. 그러는 동안 “왕이 궁에 돌아가서는 밤이 새도록 금식하고 그 앞에 오락을 그치고 잠자기를 마다하니라(18).” 이를 보면서도 기이하다. “이튿날에 왕이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 굴로” 갔다(19). 다니엘을 던진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되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고 어이없는 확인을 한다(20).
그런데 이미 사자 밥이 되어 죽었을 줄 알았던 “다니엘이 왕에게 아뢰되 왕이여 원하건대 왕은 만수무강 하옵소서.” 하고 도리어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전하는 저의 말은 참으로 경이롭다.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22).” 그러자 왕이 기뻐하며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고 저를 확인한다.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23).” 판세는 역전되어 왕은 저를 참소한 자들을 끌어오게 하였다. 심지어 그들의 처자들도 같이 끌어다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였다. 굶주린 사자는 그들이 굴 바닥에 닿기도 전에 그들을 움켜 그 뼈까지도 부서뜨렸다. 다음에 이어지는 왕의 엄명이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였더라(26-27).” 그렇게 다니엘은 다리오 왕의 시대에도,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도 형통하였다.
저의 형통함의 근거는 하나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시 147:1).” 왜 그럴까? 오늘 시편은 마치 다니엘서 내용의 주제 같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10-11).”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두려워할 걸 두려워할 줄 아는 일이다. 그 두려움은 저들이 아니다. 나의 구원은 나를 의롭다하실 수 있는 자를 우러러 그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에 있다. 그리스도 예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바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정해진 규례에 따라 기도를 했다는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렇게 기도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기 때문인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오늘 우리에게 남은 것은 화평이다. 화평은 인위적인 게 아니라 주변적으로 제3에 의해 주어진다. 내가 수고하여 얻은 것이 화평은 아니다. 참으로 그 앞에 나아가는 것뿐이다. “그 날에 큰 나팔을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멸망하는 자들과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들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예배하리라(사 27:13).” 그런 와중에도 주를 믿고 신뢰하는 것을 하나님은 귀히 삼으신다.
종종 우리의 다급함이 이를 판가름 낸다. 주를 바랄 것인가, 세상에 어떤 구원할 만한 것을 구할 것인가. 이를 알 때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있다. 먼저는 울며 돌아와 간구하게 된다.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렘 31:9).” 그러므로 진노를 피해 주께 달려와 숨는다. “여호와여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건지소서 내가 주께 피하여 숨었나이다(시 143:9).” 다니엘이 다니엘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형통하게 하심이었다. 근간은 저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였다.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7).” 나의 이러했던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즉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 즉 오늘의 내가 오늘을 살며 어쩌다 여기까지 이른 게 아니다. 이미 나는 창세전에, 예정하사, 택정하신바 된 자임을 ‘의롭다하심을 받은 자’로서는 다 아는 일이다. 그러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33).” 나 자신이 한 일이 아니다. 이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물론 다니엘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이는 우리의 공통된 분모다. 변하지 않는 진리다.
곧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시 147:5).”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누가 알 수 있겠나? 가장 큰 난제는 나 같은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이유다. 그런 나를 의롭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손수 사람이 되어 오셨고, 죄를 담당하기 위해 죄인이 되어 죽으셨다는 일이다. 이 놀라운 은혜는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인식의 정도로 비례한다. 자신의 죄를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이상 은혜도 그저 고만고만할 뿐이다. 그러므로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지어다(7).” 왜냐하면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10-11).” 이를 위하여 오늘도 이 아침에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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