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

전봉석 2020. 10. 19. 05:58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

다니엘 7:27

 

그가 또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

시편 148:6

 

 

다니엘서의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모범적인 자세와 하나는, 그 세상을 통치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오늘 7장에 등장하는 네 짐승, 사자, 곰, 표범과 무시무시하게 생긴 짐승들이 어떤 나라 무슨 권세들을 상징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세상 그 어떤 권력과 권세를 가졌다 해도, 특히 네 번째 짐승은 더욱이 하나님을 대적한다. 성도들을 괴롭힌다. 그것들이 나름 이 땅에서의 당당한 윤리와 교육, 도덕과 가치를 주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모든 게 탐욕스럽고 그 이익을 추구하는 데는 끝이 없다. 그러나 의미 없는 것은, “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26).” 그 끝이 엄연하다는 것이고,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나라들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거룩한 백성에게 붙인 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섬기며 복종하리라(27).” 이를 뒤집을 수 있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이다. 이를 알게 하심이 성경의 원리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결국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바르게 한다.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주어진 몫의 인생을 자기 주관대로 살 것인지, 성경대로 살 것인지 하는 문제는 단지 내 몫의 인생을 좌우하는 문제가 아니다. 영원한 영생의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삶과 직결되어 있다. 단지 이 땅에서의 아옹다옹 사는 것으로 사는 게 전부라면 더 말해 뭐할까? 그저 나의 삶이 나의 삶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후손에게 이어지고 오늘에 이르러 이 세상을 주도하고 있는 것처럼 영원한 나라에서의 삶도 다르지 않다. 가령 친구는 그의 부친이 폐암일 가능성이 높다며 검사 결과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일찍이 신장이 좋지 않아 투석을 하며 지내셨던 저의 삶을 두고 한숨지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삶은 돌아보질 않아서 한 조카는 교도소에 있으나 그나마 한 아이는 돈을 많이 벌어서 효도한다며 좋아라하는데,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는지 오래되었다. 문제의 핵심을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는 게 그게 전부라면 모를까, 하다못해 자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이 땅의 삶이 영원한 삶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에는 별로 그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소망은 그런 게 아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그러니 무엇을 붙들고 살 것인가?

 

<처음 사람 아담과의 언약>은 모든 언약의 초석이 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즉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언약에 대해 사람은 이를 범하였고, 그 언약은 발동되었다. 우리의 죽음은 기정사실이 되어 육신의 죽음은 말할 것도 없고 영원한 죽음까지도 피할 길이 없게 되었다. 그때 부정모혈로 태어나는 사람의 후손에서 벗어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이를 이미 저의 후손들에 앞서 약속하신 것이다. 그 언약의 예표는 결국 사람의 후예로 부정모혈의 후손들은 번창하였으나 더더욱 죄에 빠졌고, 그리하여 <노아와의 언약>이 이루어졌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8:20-22).” 곧 그 사람이 마음에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 그럼에도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9:13).”

 

그리하여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이 무지개이다. 그러한 일이 있고도 결국 사람은 바벨을 건설하여 더는 물로 심판당하는 일을 면하자 하여 스스로 쌓아 올린 바벨탑이 오늘 이 땅의 모든 권세를 말한다. 스스로의 자구책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성, 바벨성은 모두 멸망할 것이다(계 18, 19장). 이어 믿음의 사람과 백성들을 따로 구분하여 세우셨으니 바로 <아브라함과의 언약>이다. 저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그의 후손들로 하나님의 저녀를 삼으시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1-3).”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시는 이신득의의 약속이 여기서 발판을 이뤄 실행되어진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17:4-5).”

 

이는 저와의 약속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9-10).” 곧 믿음의 후손으로,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진다. 바울은 이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칭의, 곧 자신이 죄인인 것과 이를 알고 주께 나아오는 자에 대하여 약속하신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때 자신의 죄를 죄로 알기까지는 <시내산의 언약: 율법 언약>이 있었다. 율법이 없이는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법이 없으면 법규를 어기건 어기지 않건 어느 것도 죄가 되지 않는다. 그와 같이 규례가 있어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8:5).” 그것으로 무엇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되어진다. 곧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6).” 이는 곧 행함으로 의롭다하는 구원의 언약이며 은혜 언약의 필연성을 알게 한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 3:7-8).”

 

그러므로 이 율법 언약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죄가 얼마나 죄 된 것인지, 그 끔찍한 죄의 속성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러므로 이를 알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할 때와 달리 이것으로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아는 것이다. 그렇듯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5:13-14).” 곧 시내산 언약 이전까지의 삶이란 죄가 왕 노릇하는 삶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또 하나, 율법 언약이 주는 유익한 목적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 죄의 문제를 안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이것이 이제 우리에게 믿음이 들어오고부터,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25).”

 

더는 무엇을 행하고 행하지 못하고, 또는 행하지 않고 하는 문제는 문제가 아닌 게 되었다. 무엇을 해도, 안 해도, 우리는 모두 죄인인 것과 그 죄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믿는 믿음으로 더하신다. 결국 우리가 살려면 예수를 믿고,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회개함으로 이 땅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까지 나아가는 길임이 좌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의 언약>은 구약의 언약들과 다르지 않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1-3).” 저 또한 행함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그의 행함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지, 사람은 여전히 불완전하여 모세나 다윗이나 베드로나 성경의 누구라도, 또는 누구처럼 타락을 일삼기도 하면서 그래도 주의 긍휼하심 앞에 나아온다.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 3:5-7).” 성경의 지혜로 산다. 

 

오늘 다니엘의 환상과 그에 따른 의미가 결국은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 우리가 그의 진노에서조차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은혜뿐이다. 값없이 의롭다하심으로만이, 이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그가 또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시 148: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