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다니엘 9:18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50:6
다니엘이 기도한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19).” 곧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하는 저의 기도에 마음이 울리는 것 같다. 다리오 왕이 통치하는 첫 해에 다니엘이 예레미야가 적어둔 말씀을 읽고,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이면 그칠 것이라는 데 기인한 것이다. 저는 금식하고 주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결심한다.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크게 외쳐 아뢴다.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4).” 하고 말씀을 붙들고 주의 이름을 중심에 두고 고하는 것이다. 우리가 범죄하였고,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음을 시인한다.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전하여주는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음을 고한다. 그러니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치는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과 같”게 되었음을 인정한다(7). 그러나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용서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9-10).” 저의 고백이 가슴을 저민다.
그렇게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에게 내리사 우리와 및 우리를 재판하던 재판관을 쳐서 하신 말씀을 이루셨사오니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12).” 즉 어떤 고충과 어려움이 주의 말씀을 이루는 지름길이 된다.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돌이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15).” 인정하고, 간구한다. “주여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따라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들에게 수치를 당함이니이다(16).” 아,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18).” 주의 공의 앞에 설 자가 없다. 주의 긍휼하심만이 살 길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19).” 이렇게 기도할 때 천사가 와서 이를 담아 듣고 섰다. “곧 내가 기도할 때에 …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이르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느니라(21-22).”
주가 주시는 지혜와 총명이 없이는 기도도 회개도 찬송도 없다.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23).” 이와 같은 고충은 기한이 있다. 반드시 끝은 온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27).” 도무지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곤란한 동안’이 계속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4).” 그렇게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5).” 이와 같은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6).”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고 정치를 생각하며 사람들의 강퍅해진 마음을 살펴본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7-8).” 이와 같은 말씀 앞에 깨달아 귀 기울이며 마음을 더할 수 있는 것이 오늘에 가장 큰 은총이었다. 그러나 어제도 종일 마음을 사로잡았던 말씀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 그리스도에게 주시는 자이다. 저는 기필코 주께 나아갈 것이다. 어떠하든 저를 쫓아내지 않으신다. 그러니 죄에서 놓여났으나 주께로 가지 않는 자들도 있다. “너희 이 세대여 여호와의 말을 들어 보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캄캄한 땅이 되었었느냐 무슨 이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 하느냐(렘 2:31).” 그렇게 주를 멀리하나 ‘남은 자’는 안다. “그런즉 칼을 피한 소수의 사람이 애굽 땅에서 나와 유다 땅으로 돌아오리니 애굽 땅에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러 사는 유다의 모든 남은 자가 내 말과 그들의 말 가운데서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알리라(44:28).” 모두가 죄 가운데 있으나 전부가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올 것이다.’ 하신다! 가령 둘째 아들의 경우처럼 말이다.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마 21:30).” 주의 백성은 회개하게 돼 있다. 주의 권능으로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주의 백성은 그러하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마 27:25).” 기어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며 하는 저희의 말이 무지하고 끔찍할 따름이다.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도 듣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대하 33:10).” 그런데 후에 저는 돌이켰다.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12-13).” 누구는 저처럼 극적으로 돌이키기도 한다. 주의 백성이다. 성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이다.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 돌이키기도 한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눅 23:42).” 일평생을 주를 떠나 살다 끝내 정하신 길로 돌아서는 것이다. 반드시 그 일은 이루어진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그러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나?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사 29:18).” 그렇게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43:18).” 주의 권능 앞에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 자가 복되었다. 주께서 나로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하셨는지를 돌아보며 말씀을 찾아보았다.
다들 어려운 시절이다. 어느 때고 안 그랬던 적이 있었나? 그러나 그와 같은 악함마저도 주의 부르심을 막을 수는 없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찾아내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남긴 자를 용서할 것임이라(렘 50:20).” 주께서 하시는 일에는 거침이 없으시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덮으시고 감추고 제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33:8).” 그렇게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9).” 최소한 나는 나의 행적을 보며 두려워 떤다. 어찌 나 같은 자가 주의 은총과 은혜 가운데 거할 수 있을까? 그 많은 죄악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나를 이끌어가던 모든 어둠으로부터 나를 건지셨다. 아무리 구제불능 같아도 하나님은 기필코 이루신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습 3:12).” 모두가 잘난 것을 자랑하고 잘난 것을 추구한다 해도,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롬 15:12).” 주가 행하심이다.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31).”
일련의 이런저런 현실의 일들이 전혀 기이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렘 31:9).” 그러니 누구더러 이렇다, 저렇다, 비판하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김정은’이라고 불가능한 일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절대적인 약속의 자녀는 그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 하나님은 모든 우주 삼라만상을 동원하여 그의 구원을 위해 예비하셨고 제공하신다. 곧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더러 라가라(히브리 말의 욕설) 해서는 살인하는 것이요, 도적질하는 일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입에 자갈을 물려 함부로 누구에 대해 뭐라 하는 말을 삼가야 하는 이유다. 현재 회개가 없다고 해서 끝장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러니 나의 할 일은 하나뿐이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시 150:1).”
가끔은 다들 남은 인생을 대비하며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고 어떤 기술을 익히고 노후대책으로 돈과 건강을 더욱 애지중지하게 여기지만,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2).” 나는 나의 남은 생이 보잘것없다 해도 온전히 주만 바라며,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번번이 생각은 분산되고 마음은 어지럽기 일쑤지만, 그러할 때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일깨우신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3-4).”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과 그 자리에서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5).” 그렇게 날마다 나의 나은 생이 모두 꽉 차게 채워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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