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이르되 내 주께서 나를 강건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
다니엘 10:19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6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는 동안 하늘로부터 은혜가 내려온다. 이는 찰나적이면서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기도는 은혜 받을 자의 것이다. 오늘 다니엘서에서 먼저 기도의 고단하고 즐거운 역설의 의미를 묵상할 수 있다. “인자와 같은 이가 있어 내 입술을 만진지라 내가 곧 입을 열어 내 앞에 서 있는 자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주여 이 환상으로 말미암아 근심이 내게 더하므로 내가 힘이 없어졌나이다(16).” 그냥 읊조리고 아뢰는 말로 그치는 게 아니라 온 마음과 온 정성이 다 기운 것이 기도다. 내 입술을 만지심으로 나는 되뇌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내 몸에 힘이 없어졌고 호흡이 남지 아니하였사오니 내 주의 이 종이 어찌 능히 내 주와 더불어 말씀할 수 있으리이까 하니(17).” 나의 의지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리 내가 누추하고 남루한 지경에 처했다 해도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 30:21).” 항상 은혜가 먼저인데 기도가 먼저인 것 같다. 우리가 입을 열 때 은혜가 실감된다. 실은 은혜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신다.
오늘 본문에서 이를 돕는 이를 본다. 여러 명인 것 같으나 하나다. 한 손이 깨운다. “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단 10:10).” 공공연하게 주는 나를 돕는 이심을 알리신다. 누구 어디 다른 이가 더 없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이를 받아 히브리서 기자는 한 발 더 나선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결국 나의 기도는 나의 의지로 하는 게 아니라 돕는 이가 내 입술을 여시는 것이다. 저는 나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람의 모양으로, “또 사람의 모양 같은 것 하나가 나를 만지며 나를 강건하게 하여(단 10:18).” 붙드신다. 즉 하게 하시는 이가 하게 하심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이다. 막연한 구함과 요구가 아니라, 주의 뜻을 따라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이르되 내 주께서 나를 강건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19).” 나로 강건하게 하시는 게 기도다. 수시로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에 봉착할 때마다 어려움은 나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다. 그렇게 나만 홀로 있는 일은 고독하고 외로운 싸움 같으나 땅에 얼굴을 대고 깊이 잠드는 평안함이기도 하다.
들춰보면 저마다 우여곡절이 없는 가정이 없다. 초등학교 4년생인 딸애가 실은 ‘은따, 왕따’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더라고 누가 전화를 하였다. 그래서 다음 날 학교에 상담을 가기로 했다며, 그 전에 통화를 하게 된 것이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괴롭히는 아이만을 욕하고, 자기 자식만을 두둔하게 돼 있다. 저의 말을 한참 듣다가 듣기 싫겠으나 ‘당한다’의 경우 그렇게 일방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듣고 보니 바른 말을 잘하고, 이를 자꾸 선생에게 고자질을 하였던 모양이다. 나름 완벽주의자로 정의감에 시달리는 아이였다. 그러니 괴롭히는 아이 입장은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부모가 끼어들면 일은 더욱 복잡하게 얽힐 거였다. 그러니 우리가 이 땅에 산다는 일은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일들로 뒤엉켜 있다는 소리다. 마치 나만 그런 것 같은 게, 기도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단 10:8-9).” 은혜 없이 평안도 없다. 누구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은혜는 말씀으로 임한다.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10).” 주의 말씀을 청종하지 못하면 기도도 할 수 없다. 소원을 말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12).”
학창시절 나는 늘 ‘왕따’였다. 뭘 해도 ‘은따’였고, 알게 모르게 말할 수 없는 괴롭힘을 당하며 살았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가만히 돌아보면 그런 것이 상처가 되어 트라우마가 되어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를 쉴 새 없이 글로 썼고, 고등학교 때는 어디에 그 소재로 출품을 하여 공개적으로 까발렸던 것이다. 안으로 갖고 있으면 더럽고 추하여 악취가 나도 밖으로 드러내면 더는 나와 무관하게 된다. 마르셀 뒤샹의 <샘>이란 제목의 변기 전시가 떠오른다. 혼자만의 시간, 생각하는 시간으로도 의역되곤 하는 변기의 실체는 무조건 더럽고 고약한 게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은따’를 겪고 ‘왕따’처럼 살아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기질과 기질이 서로 부딪쳐서 누구는 괴롭히는 자가 되고 누구는 괴롭힘을 당하는 자가 된다. 하지만 이는 늘 주체를 달리한다. 괴롭힘을 당하는 자도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고, 괴롭히는 자도 늘 그런 입장에 서는 것은 아니다. 이는 수시로 역전이 되어 ‘그가 나고, 내가 그다.’ 하나님은 나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을 주셨고, 그때마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달픔으로 떠벌이듯 글을 쓴 것 같다. 뒤샹의 변기처럼 더는 더러운 게 아니라, 살면서 꼭 필요한 게 되었고 더는 그것에서 악취가 나지 않았다. 아니, 그 냄새가 더는 나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셨다. 기도의 원리다.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하는 이유다. 괴롭힘을 당하든 행하든 괴롭힘의 목적은 ‘은혜의 보좌’를 사모하게 한다. 왜? 그곳에는 모자란 게 없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 그것을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그러므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 3:8).” 나의 이런저런 우여곡절, 사연과 사연이 괜한 게 아니다. 먼저는 주의 은혜로 나아가게 하고 다음은 내 곁에 어려워하는 이를 돕게 한다. 우리의 전함은 공연한 말이 아니다. 가령 저가 나에게 아이 일로 전화를 한 것과 그 사연과 나의 사연은 맞물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바라게 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순은보다 나으니라(잠 8:19).” 여전히 가난했던 날이 지긋지긋하여 그 앙갚음으로 악착같이 부를 누리려고 하는 사회가 아닌가? 우리의 허영은 온통 상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정의로운 길로 행하며 공의로운 길 가운데로 다니나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20-21).” 나를 사랑하심으로 나로 곳간을 채우게 하신다. 그렇듯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마 6:19).”
사는 집이 언제부터 부의 상징이 되고, 신발과 가방이 차고 넘치는 필요 이상의 사치가 되었다. 오늘 날의 명품은 지난날의 가난의 반추다. 못 가지고, 못 배우고, 못 누리며 무시당했다고 여기는 기억이고 음미다. 정작 추하고 더러운 것은 변기가 아니라, 거기에 쏟아내는 우리 속에서 나오는 배설물이다. 싸고 토하고 나면 느낄 수 있는 시원함처럼, 어둠이 걷히는 빛이 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 지성소의 앞마당은 언제나 피비린내로 진동을 한다. 거기서 제물을 잡고 내장을 발려내고 피를 쏟는다. 나의 글쓰기는 주 앞에 토설하는 자리였고, 주가 다 아시는 나의 일을 나는 뒤늦게 뒤집어서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내 안에 얼마나 더럽고 추한 것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었는지를 나만 가장 나중에야 아는 것이 죄다. 끝끝내 자신만 부정한다. 저도 말하길 아이의 그러한 기질이 자신을 닮았다는 것이다.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관대한…! 그런데 그러는 만큼 실은 자신이 편할 줄 알았는데, 자신을 더 들들볶는 일이었다. 죄란 누구를 더럽히는 것이기 전에 자신이 먼저 더러운 일이다. 기도는 이를 직면하게 한다. 그러면 어둠에 숨기보다 은혜의 빛으로 나아가고 싶어진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나의 지난날의 말할 수 없는 사연들이 이제는 누구를 이해하고 돕는 말로 정화되어 나온다. 어찌 아무렇지도 않았겠나만 그것 때문에 명품으로 덮고, 나의 취향으로 덧대려고 하지 않는다. 가령 어느 연예인이 그처럼 빚이 많다며 전 국민 앞에서 궁상을 떨면서도 저의 침실에는 평생 다 신지도 못할 수많은 명품 신발들로 머리맡까지 가득하다! 우리 허물의 역설은 죄의 실체다. 우리가 살 길은 자기만족이나 그러한 개인의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주의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6:57).” 아니면 다른 길은 없다. 모든 길은 막혀 불칼로 지키고 있다.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잠 8:35).” 오늘 이처럼 나에게 더하시는 주의 은혜가 내 안에 애끓는 마음과 비례한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아니면 그 속에 분노만 쌓인다.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욥 36:13).” 그래서 시험은 필연적이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어느새 또 150일이 지나 시편을 다 돌고 다시 왔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늘 나는 시편의 첫 구절을 사랑한다. 나는 복 있는 사람이다. 기본전제다. 그러므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2).” 말씀이 아니면 이와 같은 사실 앞에서 나는 좌절할 것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 여러 날을 돌아보며 지난날 나의 어릴 적, 그 눈물겹던 생존의 날들을 떠올리며 어느 아이의 괴롭힘을 듣고 주의 선하심을 상기하였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4).” 아니면 여전히 내가 죽을 맛이라. 인생이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어서 그 악취와 더러운 혐오감은 씻을 길이 없다. 그렇다면 내어놓는 수밖에! 드러내어 주 앞에 올려드릴 때 오히려 나의 부끄러웠을 치부까지도 전시가 되듯 누구에게 들려주며 주의 위로와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게 된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5).” 이 자리는 기도하는 자의 특별석이다. 그렇게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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