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호세아 1:1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편 4:7-8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출신이다. 이스라엘이 둘로 갈려 북이스라엘과 유다로 나뉘었는데, 호세아는 자신을 거론하는 첫 구절에 북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유다의 왕들을 열거한다.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에서 웃시야는 유다의 10번째 왕이었다. 이어서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로 이어지기까지 북이스라엘의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저는 “브에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브에리는 어디에도 이름이 기록된 게 없는 것으로 봐서 보잘것없는 집안의 출신이었을 “호세아”는 일찍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북이스라엘에 기대하기보다 유다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 그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다. 마치 우리가 타락한 이 땅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유다지파에서 오셨다. 저의 출신이 미천하나 그 소망은 광대한 것처럼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호세아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자이다. 저에게서 예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음란한 여인 고멜과의 혼인은 마치 죄인 중에 괴수인 나를 신부로 맞이하신 것과 같다.
예배가 감동을 주고 뭉클하고, 위로가 됐다는 소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된다. 마치 여느 대중문화 공연장을 다녀온 뒤 나올 법한 찬사로 예배가 전락된 지 오래다. 그런 가운데도 주님은 우리를 거룩한 신부로 맞아주신다. 연이어 낳은 자식들의 이름은 두려움을 자아낸다. 먼저 고멜이란 이름의 뜻은 ‘끝’을 의미한다. 끝났다는 것이다. 구원자 호세아가 끝난 여자 고멜과 결혼했다. 저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한다. 본래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이다(창 32:28). 이스르엘은 후에 지명으로만 나오고 저의 본명의 뜻은 ‘흩어뿌리다.’는 것이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수르에 멸망한다. 후에 136년 동안 유다나라도 죄에서 돌이키지 않자, BC 586년에 앗수르를 멸망시킨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다. 이어 호세아는 고멜에게서 딸, 로루하마를 낳았다. 이 이름은 복합어다. ‘로’는 ‘노 NO’를 의미하고, ‘루하마’는 ‘내가 긍휼히 여긴다.’는 뜻이다. 그러니 루하마 앞에 로가 붙었으니 ‘내가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 가 된다. 이어서 셋째는 아들을 낳은데 저의 이름은 로암미이다. ‘로’는 앞서도 찾아본 것처럼 ‘NO’의 의미로 ‘암미’는 ‘나의 백성’이란 뜻인데, ‘나의 백성이 아니다.’가 된다. 분명히 하나님은 저들을 주의 백성으로 삼아 긍휼히 여기셨는데, 더는 그러지 않으신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신 것은 후반부 10절과 11절에 나온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10-11).” 늘 그렇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다. 아무리 타락한 창녀 같은 삶이었다 해도 주께서는 우리로 주의 자녀를 삼아주신다. 이는 우리들로 주 앞에 돌아오게 하심을 의미한다. 요즘 자주 되뇌는 말씀으로 예수님이 약속하시고 장담하시는 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오면 받아 주고, 안 오면 안 받아주겠다는 의미 같으나 “올 것이요.” 즉 오게 돼 있음을 확신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아들 예수께 ‘주신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내게 오는 자”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쓰였다. 개별적이며 일대일의 관계를 의미한다. 또한 ‘온 자’가 아니다. ‘오는 자’이다. 현재형이면서 미래형이다. 아직 ‘오지 않은 자’까지 포함하고 있는 의미다. ‘만일 그들이 어찌하면’ 하는 전제가 달리지 않았다. 돌아올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이는 누구보다 예수님이 더 잘 알고 계셨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0:14-16).” 그 확신은 엄청나고 약속은 굳건하다. “나는 내 양을 안다. 양도 나를 안다.” 예수님의 믿음이다. 이는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이 확고부동하다. 그래서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기꺼이 그리 하신 것인데, 이는 아직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까지 포함한다. 그러니까 아직 돌아오지 않는 ‘하나님이 주신 자, 하나님의 것’에 대하여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는 성자 하나님의 흔들림 없는 약속이다. 오늘 호세아서가 암울하고 침체된 분위기지만 희망적이고 소망을 더하시는 데는 그런 이유다. 바울에게도 이와 같은 확신이 있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 18:9-10).” 그러므로 우리가 침묵하지 않고 주의 말씀을 전하여야 하는 이유다. 왜냐하면 “이 성중에 내 백성이 (아직) 많음이라.”
아무리 시대가 어떻다 해도, 예배가 문란하여져 세상 공연과 같이 변질되었다 해도 예수님은 이내 포기하지 않으시는 이유다. 회개하고 돌아올 백성은 엄연히 존재한다. 오늘도 인류가 유지되는 이유다.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자들이 아직 저 속에 섞여 있다. 우리 주님은 결코 포기하실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1-14).” 이는 미련이 남았거나 아직 혹시나 하는 기대 때문이 아니다. 확실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저들이 아직은 저래도 결국은 우리와 같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그것은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22-23).” 하실 것이어서, 이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4-6).” 말씀은 이처럼 말씀으로 이어지며 그 묶음은 하나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자들로 만족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우리가 비록 보잘것없고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이 시대의 낙오자처럼 살아가는 것 같으나, 교회가 무시당하고 또는 교회 간에도 격차가 심하여 그 간격이 좁혀질 리 없는 사회적 모순을 안고 있다 해도,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 10:21).” 그리하여 종종 나는 나의 치열하게 살려고 살았던 지난날의 열심보다 오늘의 남루한 옷차림 같은 날을 사랑한다. 병적으로 불안을 느끼고,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비루한 날들이라 해도 주밖에 의지할 수 없는 자로 사는 것이 복에 복인 것을 확신한다. 이와 같은 말씀의 연계를 묵상하며 호세아서가 전해주는 소망으로 저가 북이스라엘에서 태어나 타락한 이스라엘 가운데서 살지만 다윗의 혈통을 이어가는 유다나라에 소망을 두었던 것처럼, 오늘 나의 소망은 이 땅이 아닌 것을 확신하며 안도한다. 그렇게 주의 자녀들은 나올 것이다.
주님은 확고부동하셨다. 그러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그렇게 하나님은 하나하나 다 모으실 것이다.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그 날에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과실을 떠는 것 같이, 너희를 하나하나 모으시리라(사 27:12).” 오늘 시편의 기도를 이와 같은 맥락에 놓고 되뇐다. 그렇게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그러므로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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