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전봉석 2020. 10. 24. 05:59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다니엘 12:3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시편 3:7

 

 

모든 것이 마지막 때가 이르러 환난을 겪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나이 들어 병들고 고통 중에 죽음에 이르고, 역사적으로는 한 나라와 민족이 쇠퇴하여 멸망에 이른다. 그러할 때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하는 오늘 말씀이 어떤 의미인가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다. 싫든 좋든 이 땅의 모든 것은 마지막이 있고 그때에 이르면 슬픔과 고통이 따른다. 친구는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부친이 폐암진단을 받아 항암을 하게 되셨다. 신장이 안 좋아 투석을 하며 지냈는데, 연세가 많아 항암치료조차 견딜 수 있을지. 친구의 목소리는 풀이 죽어 시무룩하였다. 기도를 부탁하는 저에게 본인은 물론 너를 비롯하여 다시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자고 일렀다. 일상이 늘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았으나 먹고 싸고 움직이며 건강을 유지한 것처럼 우리 영혼도 늘 별 것 아닌 것 같은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사는 일의 연속 가운데서 신앙은 무르익는다. 더디고 한정 없는 것 같으나 이때에 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10).” 누구는 이를 깨닫고 누구는 깨닫지 못한다. 이를 말해주며 저의 그동안 안이하였던 것에 대해 말해주었다. 특히 코로나 이후 교회는 끊어지고 말은 믿는 자로 살지만 안 믿는 자와 다를 바 없이 세상에 대처하고 살았으니….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고 저는 평소와 달리 고분고분 듣고 있었다. 일찍이 동생을 먼저 앞세우고 이제 부친의 일이라. 동거하는 이와 부친을 찾아뵈러 간다며 통화를 끝냈다. 돌아보면 우리는 일상으로 다져진다. 늘 같은 날이 반복인 것처럼 같은 말이 되풀이 되는 것 같으나, 말씀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기도 없이 빈껍데기로 살았으면 저의 영혼은 의지할 곳이 마땅치가 않다. 그러할 때 특별히 시편은 우리의 희로애락을 모두 다루고 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시 3:7).” 가령 어제는 설교원고를 마치고 시편 51편의 내용을 새삼 묵상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낙심하지 않는 게 아니다. 실패와 좌절과 두려움이 없는 삶을 산다는 게 아니다. 심지어 끔찍한 죄악 중에 빠질 때도 있다.

 

그때에 우리는 주의 이름을 찾고 그 앞에 통회한다. 우리의 통회와 자복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저는 여느 제사보다 상한심령을 기다리신다. 이 시는 사무엘하 11장의 말씀에 담긴 죄악의 현장에서 비롯된다.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2).” 순간 음욕이 따랐고, 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알면서도, 범하였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3-4).” 그런 뒤 다윗의 죄는 더한다. 밧세바가 임신을 하였고, 이를 무마하려 전장에 있는 우리야를 끌여 들였으나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끝내 저를 더 깊숙한 전쟁 한복판에 밀어넣어 죽게 한 뒤,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27).” 저의 행태는 엄연히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였다.

 

이를 당사자는 무마하려 들었으나 하나님은 그리하실 수 없었다.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당신이 그 사람이라.” 하고 저의 죄를 끄집어냈다. 그럴 때 다윗이 다윗다운 것은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13).” 저는 속히 죄를 인정하고 주 앞에 통회한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생각은 하나님이 그렇게 쉽게 용서하실 수 있나? 글로 축약되어서 그렇지 저의 악함은 그동안 보여준 다윗의 행적에 비해 얼마나 치졸하고 가증스러운가. 다윗이 뻔뻔하게 용서를 구하는 일도, 이를 그렇게 간단하게(?) 용서하시는 하나님도,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바울의 진술을 보면 그 해답이 숨어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5-26).” 그리 간단한 용서가 결코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그 값으로 아들을 내어놓으셨고 대신 죽음으로 그 값을 치러주셨다. 결코 하나님은 죄를 가벼이 다루시지 않는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요 12:27-28).”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소리가 아니다. 더는 절망이 없다는 소리도 아니다. 그 죄 앞에 통회하는 자로 산다. 갑작스런 고난은 우리를 불러 세워 돌아보게 한다. 나는 그것을 어제 친구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단지 부친의 폐암 판정과 그 안타까움으로 쩔쩔맬 것이 아니라, 먼저는 자신을 돌아보아 주 앞에 통회하는 마음으로, 자복함으로 나아와야 한다. 그리고 부친을 마주할 때 그와 같은 위로로 주의 선하심을 증거하고 믿음 안에서 위로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일상의 힘’이다. 나는 그리 믿는다. 어느 날 뚝딱, 성령의 역사로 단번에 의인이 되어 더는 죄 없이 사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나는 아들과 둘이 앉아 조금은 벌줌 해도 저녁상을 물리고 나란히 가정예배를 지속하는 그 시간이 귀하다. 다른 모든 게 용서가 된다. 그것도 아이 스스로 ‘예배 드려?’ 하고 식탁에 와 앉는다. 아내는 뒤늦게 야간수업을 나가고, 딸애는 조금 늦게 퇴근을 하니 우리 둘이 그리 드리는 예배인데….

 

늘 반복되는 기도 같고, 또 같이 읽는 성경부분이 레위기서 부분이라 저들의 율례와 규례가 지겹기도 하고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고 재미없다 해도… 이와 같은 날의 반복이 우리 영혼을 그릇된 길로 가지 않게 한다. 아내도 딸도 못하게 되자, 아들 녀석도 안 한다 그러면 어쩌나 했는데… 나는 나의 반복의 일상을 그래서 소중히 간직하며 유지한다. 대체 이런 시간, 이런 묵상글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싶고, 수없이 다듬으며 일주일 내내 쥐고 있는 설교원고작성이 뭐 그리 중요한가싶고, 늘 같은 기도와 바람과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그저 대수롭지 않은 듯 여겨질 수 있겠으나… 바람이 불고 해가 지고 다시 새날이 오고 그날이 그날 같은 날들로 우리의 삶은 성장하고 변하는 것처럼, 영혼의 성장과정도 그렇게 늘 파란만장한 것만은 아니다. 친구에게 잠깐 들려준 이와 같은 말이 저를 일깨우고 붙들었을까? 그래도 기도를 부탁한다며 전화를 한 것이지만, 나는 저에게 닥친 슬픔이 부디 더 큰 영혼의 슬픔을 미리 강구하는 대책의 순간이 되길 바랐다. 다시 다윗의 51편 시로 오면, 저는 가장 먼저 주께 행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1).”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은혜를 베풀어, 주의 긍휼하심을 따라 자신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주는 누구신가? 누구시기에 우리가 이처럼 뻔뻔하게도 주께 구할 수 있는가?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이를 붙들고 다윗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였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2, 7).” 우슬초는 제사장이 병이 나았음을 증거 하며 피를 찍어 집에 뿌리던 나뭇가지다.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과 살아 있는 새를 가져다가 잡은 새의 피와 흐르는 물을 찍어 그 집에 일곱 번 뿌릴 것이요(레 14:51).” 오늘에 이르러 우리가 의지하는 예수의 피뿌림을 입어 담대히 주 앞에 나아가는 것과 같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다윗은 자신의 죄의 엄중함을 알고 있었다. 죄가 양심을 괴롭히고(시 51:3), 무엇보다 하나님을 거스르며(4), 그런 점에서 하나님을 옹호하고(4), 본래 타락한 자신의 본성을 아뢰고(5), 자신의 마음을 비추는 하나님의 자비의 빛을 구하였다(6). 그렇듯 추한 자신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며(8, 10-13, 15, 17), 자신의 여섯 가지 마음을 쏟아냈다. 자신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인지(11), 새롭고 정직하고 굳건한 마음을 바라며(10), 자원하는 심령과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기를(11), 다시 찬송이 흘러나올 수 있기를(15), 그렇게 하나님을 다시 증거 하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13), 그리고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란 것을(17).

 

그날그날 말씀으로 누구의 책으로 우연처럼 접하게 되는 일상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응답하신다. 그리고 난 뒤 친구와의 통화라서, 나는 해줄 말이 많았는데 속으로 대신하였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단 12:13).” 이렇게 하여 다니엘서를 마쳤다. 하나님의 통치와 세상만사 어그러진 것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었다. 두려움과 기대가 공존한다. 그러할 때 시편은 늘 그렇듯 하나의 길을 제시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 3: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