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전봉석 2020. 10. 27. 06:00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세아 3:4-5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편 6:9

 

 

‘호세아, 여호수아,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하다’이다. 때론 하나님의 명령이 이해가 안 되는데, 호세아는 이에 순종하고 고멜-음녀가 된 그 여자를 되찾아온다. 고멜의 뜻은 ‘끝’이다. 끝난 여자다. 그런데 저를 위해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저의 몸값을 달아주고 데려온다. 포도주는 하나님께 전제로 부어드릴 때 쓰는 것으로 주 앞에서 기쁨이다. 그것을 가공하고 말려서 건포도 과자로 만들어 다른 신, 바알을 위해 즐거워하였던 것이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이 이해할 수 없었을지 몰라도 순종하였다. 저들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에게 빼앗겨,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었다. 그럼에도 주의 긍휼하심으로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그리 되게 하시는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호 3:4-5). 하나님께 바치고 드려져 기쁨이 되어야 할 것을 바알을 위해 준비하고 그것으로 즐기느라 정신이 팔려있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또’라는 부사가 눈에 띈다. 그것은 어떤 사태나 행동이 거듭되었음을 드러낸다.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1).” 우리의 죄가 끈질기게 거듭됨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칠 줄을 모르신다.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주님의 마음을 가늠할 길 없다. ‘보리 한 호멜 반’의 가치는 ‘은 열다섯 개’와 같다고 한다. 그럼 ‘은 30’을 달아 저의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온 것인데,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2)” 이는 성경에서 종의 몸값으로 '은 30'을 쳐주었다.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출 21:32).”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값이 '은 30'이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마 26:14).” 호세아가 이 값을 지불하고 고멜을 데려온다는 대목에서 예수께서 이 값으로 자신의 몸값을 달아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상기시킨다. 앞서 에스겔서를 묵상할 때,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16:6).” 말씀하시던 게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철딱서니 없고 피투성이 같은 몸으로라도 살아 있으라, 하시는 것이다. 그럼 주님은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8).” 우리의 보잘것없는 모양을 성숙되게 가꾸어주셨다. “내가 물로 네 피를 씻어 없애고 네게 기름을 바르고…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모시와 수 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올랐느니라(9-13).” 그렇게 “네 화려함으로 말미암아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14).” 그러니 이 모든 게 주의 은혜가 분명한데, 우리의 변심은 번번이 배교다.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15).” 어제 문득 낮 동안에 이 말씀을 다시 찾아보며, 우리의 날들이 얼마나 그러한가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주께 돌아오는 자는 용서하신다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그러니 주님 앞에는 ‘돌아온 자’가 있고, ‘돌아오고 있는 자’가 있고, ‘돌아올 자’가 있다. 돌아오는 자는 여전히 돌아올 자에 속한다. 돌아오고 있다는 것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리가 된다. 그 차이는 크다. 돌아온 자는 더욱 가까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거한다. 그리고 돌아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안식을 취하고 쉼을 얻는다. 하지만 돌아오는 자는 여전히 그 짐을 자신이 지고 있다. 그 무게에 눌려 죽을 맛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리고 돌아온 자는 이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지만 돌아오는 자는 타는 목마름으로 허덕이다 일시적인 것으로 목을 축일 뿐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이렇듯 생수의 물을 마시려면 나아와야 한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또한 돌아온 자는 더 이상 원수에게 쫓기지 않기만 돌아오는 자는 여전히 불안 불안하게 원수에게 쫓기며 산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히 4:3).” 돌아온 자는 안식을 취하나 저는 여전히 종종걸음을 치면서 죽을 맛인 것이다. 돌아온 자는 행여 원수의 유혹이 있을지는 몰라도 안전하나, 돌아오는 자는 그 유혹의 광포함에 휘둘리며 자꾸 또 쓰러지고 넘어지기 일쑤다. “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눅 9:42).” 안타까운 것은 그러면서도 여전히 경계를 하고 미심쩍어하며 자기주장과 고집에 빠져서 미적거린다.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예 돌아가는 것도 아니면서 어정쩡한 상태로 간 보듯 주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온 자는 이제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여하나 돌아오고 있는 자는 여전히 죄 많은 누더기 옷에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15:22, 24).” 돌아온 자의 눈물과 한숨은 기쁨과 찬송이 되었으나, 돌아오고 있는 자는 여전히 눈물과 한숨 속에 젖어서 산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롬 5:11).” 이와 같은 차이를 찾아가며 연관 지어 메모하는 일은 즐겁다. 어떠하든지 나에게 두신 일이라.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고 어지럽고 괜히 몸이 이상한 것 같아 오후께는 두어 번 소파에 누워야 했다. 왜 나의 마음은 내 의지와 달리 어려워하고 무엇을 불안해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제 그러려니 한다. 아니 오히려 그것 때문에도 말씀이 절실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자.’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말씀을 찾고, 오늘 아침 호세아서의 말씀을 보며 ‘아하’ 하고 감탄을 한다. 나의 모든 순간들이 허투루 버려지지 않는 것을 느낀다. 불안은 안정을 찾고, 안정은 주를 바라는 것이어서 말씀을 찾고, 말씀을 따라가며 연관되는 여러 말씀의 정도가 늘 새롭기만 하다. 평안히 그럴 수 있기를 바라지만 새벽에 이처럼 일어나 앉아 현실로 돌아오면서 몸은 또 불안을 호소하고 나는 습관적으로 안정제를 삼키면서도, 말씀을 이어간다. 그러니까 나에게 말씀의 자리는 불안이 나를 이끌어다 앉히는 자리다. 돌아오는 자는 아직 그 마음이 확실하지 않아 심지어 자신도 모르는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는 다 알고 계신다는 미처 모른다. 다윗은 이를 알고 있었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 38:9).” 저의 기도에 나도 아멘 한다. 아직 거리가 먼데 아버지는 알고 먼저 나아가서 맞이하셨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나의 마음 속의 마음을 나보다 먼저 다 알고 계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가 기웃거리고 있을 때,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19:4-5).” 또한 나다나엘이 아직 빌립에게 듣고 돌아오기 전부터 주님은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7-48).” 그러니까 오늘 내가 돌아온 것은 내가 여기로 돌아오기 전에부터 주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그동안 나의 미심쩍어하는 마음까지도,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막 10:47).” 부디 이제는 이 마음이 닫히지 않도록 해야 하고, 계속되는 여정에서 응원하시고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

 

돌아온 자는 그렇게 주 앞에 자신을 다 드러내며 기도할 수 있다. 오늘 시편의 기도가 그리 들린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시 6:1).” 아주 담대히, 그러나 절박하게 주께 아뢴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2).” 나의 모든 사정과 여건이 대수가 아니다.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3-4).” 비록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7).” 하지만 이러한 모습까지도 주께 더는 감출 필요가 없다. 나는 더 이상 ‘돌아오는 자’가 아니다. ‘돌아온 자’로서,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8).” 다시는 돌아갈 마음이 없다. 오직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9).” 그러므로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