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호세아 13:4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시편 16:1-2
늘 보면 교만이 문제다. 자신을 높이는 데 있어는 믿을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우상이라. 오늘 말씀의 첫 구절이 그것을 지적한다.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호 13:1).” 저가 자신을 높여 하는 짓은 고작 범죄다. 죄는 항상 더하여져 “이제도 그들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정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은장색이 만든 것이거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와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2).” 은은 돈의 가치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널리 귀히 쓰인다. 이를 가지고 ‘자기를 위해’ 정교하게 우상을 만든다. 사뭇 공들여 사는 인생으로 그것에 입을 맞춘다.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침 구름’ 같고 ‘이슬’ 같아서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이다(3). 그런 저들을 오늘 말씀은 붙들어 앉혀 상기시킨다.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4).” 의당 그러려니 하고 여기는 것의 소중함은 잃어봐야 안다. 있을 땐 그저 당연한 듯 잊고 지낼 때가 흔하다.
아무래도 어수선한 시절이라. 늙으신 부모는 아프시고, 어찌 할 능력은 안 되고, 이에 드는 자괴감은 스스로 우상을 정교하게 만드는 것과 같아서 마음을 공들여 자기환멸을 어루만지고 다룬다. 슬픔의 역설은 희한하게도 벗어나고 싶은 만큼 끌어안게 된다는 것이다. 죄의 속성을 닮았다. 더러운데 한 번 더러워지면 두 번 세 번 연거푸는 덜하게 느껴진다. 거짓말도 도둑질도 처음이 어렵지 양심에 찔리던 것이 어느 정도 잦아들면 다음부터는 수월해진다. 그러니 누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무력감에 젖었는데, 그 젖은 영혼이 싫지가 않다. 슬퍼하는 게 기뻐하는 일보다 수월하고, 책임과 의무는 그만큼 줄어든다. 자신이 공들여 만든 송아지에게 입을 맞추는 격이다.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5-6).” 우울감은 이처럼 은혜를 잊는 채 살아가고, 무서운 것인데 싫지 않고, 즐겁지 않은데 편하기는 하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이를 선호하고 이는 죄의 특성이다. 어둠에 움츠려서 자기 영혼을 곱게 접어두는 것이 더 쉽다.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자포자기한 것처럼,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리면 그뿐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따귀를 후려갈기신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사자 같고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키리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7-8).”
이것은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6:1).” 하나님은 반드시 그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10).” 그렇게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11).” 이는 그리스도이시면서 동시에 우리 믿는 자들에게 남기신 사명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12).”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날마다 매순간 드려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울감은, 무기력증은 안 그래도 되는 빌미가 더한다. 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그러니 누가 그런 삶을 살고자 한다고 해서 살 수 있겠나?
가령 이번 주간은 누굴 기다렸다. 온다 하여 마음을 준비하고 시간을 어찌 맞추고 할 말도 미리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느라 여러 번 다시 쓰는 원고처럼 마음을 기울였는데 저는 오지 않았고 연락도 없었다. 세상은 늘 그런 식이다. 어쩌면 우리 일이란, 날마다 이처럼 공든 탑이 무너지는 일이다. 내가 공들인 만큼 자꾸 무너뜨리신다. 그러나 주님은 이를 빼앗긴 게 아니라 스스로 주시는 것이라 하셨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8).” 우리에게도 이와 같아서 우리가 공들인 바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하늘 곳간에 쌓여간다. 가령 혼자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있을 때 자주 그런 생각을 주신다. 누가 온다고, 하여 시큰둥하다가도 전해야 할 말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나눌 말씀을 여러 번 되새김질하게 하시면서, 결과적으로 저는 오지 않아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그것이 주의 나라 창고에 들이심이었다. 이는 마땅히 두려워할 자로 두려워하게 하심으로 기쁨을 더하심이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5).”
부모의 늙고 병듦 앞에 자식 된 입장에서 속수무책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그럴 수 있지. 부모 된 입장에서 자식에게 보란 듯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그럴 수 있는 것은 그래도 된다는 게 결코 아님을. 스스로의 만족은 채울 길 없어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고, 주의 은혜는 눈에 띄지 않는 법이니. 예수님은 오히려 이를 기대하시며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나름의 보람이 아니셨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7-8).” 하나님의 확증을 위한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을 내 삶에서 그리 이해한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의무와 할 수 있는 능력은 별개다.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신다. 그런 나의 능력은 내 것이기 전에 하나님의 것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니 내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된다고 비탄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리 적당하게 지으셨고, 맡기셨다. 가령 두 달란트나 다섯 달란트 받은 자들에게도 적당히 맡기셨다. 저들은 그런데 그 이상을 감당했다. 무슨 의미일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이처럼 결과를 초월하는 일이다. 결과나 어떤 상황에 연연해 하지 않고, 묵묵히 해야 할 바를 '또 오늘도' 할 수 있는 정도에서 성실함으로 감당하였을 뿐이다. 누가 오고 안 오고, 어떤 성과를 얻고 못 얻고, 이는 나중 일이고 내 몫이 아니다.
그런데 그러한 결과나 오늘의 상황을 끌어다 안고 슬픔으로 자존심을 상해 하고 거기에 안주한 이가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자였다. 저는 사실 상대적으로 남들보다 적은 것에 불만이 아니라, 그게 편했던 것이다.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슬픔이 가지고 있는 역설이다. 슬퍼하는 일이 기뻐하는 일보다 책임감에서는 훨씬 자유롭다. 이를 딛고 일어서는 일은 그럼에도 할 건 하는 것인데, 슬픔이 얼마나 유용한가? 할 걸 안 해도 되고, 미루어도 되고, 그럴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니까! 그래도 되는 것이다. 자신을 그리 두는 이유다. 누가 듣는다고 설교원고를 그처럼 공들여 여러 번 퇴고하면서 다듬을까? 하고 드는 마음은 실제 하기 싫은 마음의 반영이다. 누가 온다고 해서 나는 준비하는 것인데, 저가 오지 않음으로 이 모든 게 그럼 버려지는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더욱 주를 의뢰하며 그 뜻을 되새기게 되는 것이고, 정작 저가 안 와서 더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로 하나님의 몫이다. 나에게 맡기신 분깃이 아닌 것이다. 나는 다만 무던함으로 족하였다. 묵묵히. 오랜 세월 나는 이를 연마하며 사는 도공 같다. 하나의 완성된 도자기를 얻기까지 수없이 많은 그릇이 깨치고 부스러뜨려 다시 물에 으깨어 개고 다지고 하는 일이 수도 없이 반복되는 동안, 손에 익어 마음을 다스리는 실력은 장인이 된다. 어제는 누구 생각을 하다 그런 마음이 닿았다. 왜 안 오나, 뭐라 나무랄 게 아닌 것이다. 저는 저대로 주의 돌보심 가운데 연마의 시간을 보내는 것일 테고.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 69:31).” 하나님은 나의 결과가 아닌 과정에 계신다.
그러므로 다시 아침이다. 말씀 앞에 끌어다 앉히는 것은 언제나 나의 연약함이다. 그것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담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보면 다들 한 고집들 하고 산다. 저마다 자기 생각을 이기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 그러면서도 다들 자신을 잘 안다고 여기며 사는 일이니, 누구 말이 그 귀에 들어오겠나? 오히려 그것에 마음을 상하기 일쑤고, 상한 자존심은 금송아지처럼 정교하게 만든 우상이라, 그것에 입맞춤할 뿐이다. 그러니 날자! 우울한 영혼이야. 뺨을 때리시는 주의 손길을 두려워하면서라도 날자! 누구에게 기대하지 말자. 오늘도 오직 말씀 앞에 앉아 이처럼 위로를 얻는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사 50:7-8).” 주께서는 노아의 무던한 손길에 구원의 방주를 맡기셨고, 묵묵히 걸음을 떼는 모세의 손에 지팡이 들려주셨다. 감옥에 갇혀 있는데도 바울의 입에 주의 말씀을 넘치게도 담아 주셨던 것처럼.
오로지 나의 의지는 말씀뿐이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9).”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1-2).” 오늘 시편의 말씀은 위로하심과 새 힘을 더하심이 넘친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3).” 이 얼마나 벅차고 감사한 일인지. 그리하여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6).” 오늘 내게 맡기신 한 날의 수고로 족하였다. 그렇게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7).”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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