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전봉석 2020. 11. 10. 05:50

 

 

보라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가운데에서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

요엘 3:1, 16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시편 20:7-8

 

 

 

‘보라, 그 날 곧’ 그 날이 온다. 예수 재림신앙은 언제나 오늘이다. ‘곧’이며 ‘지금’이다. 예수 재림신앙은 우리로 더욱 주를 의지하게 하며, 환난을 견디는 의지가 된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개척하여 잠시 목회를 하였다. 저들에게 바울은 예수 재림을 가르쳤고, 예수 재림신앙은 저들의 혹독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이었다. 그런데 하나둘 예수 재림 전에 죽고 순교하는 것이다. 저들은 어찌 되는 것일까? 교인들은 혼란스러워하였다. 바울은 저들에게 편지를 썼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알지 못함을 원하지 아니하노니’ 곧 바로 알아야 한다. 저들의 죽은 자들을 ‘자는 자’로 부르며, 이를 아는 것은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한다. 바울도 예수 재림을 믿었다. 자신들이 죽기 전에 예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라 붙들었다. 하지만 그 때와 시간은 알 수 없다. 예수님도 이를 분명히 하셨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23).” 아무도 알 수 없어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

 

그렇다면 바울이 거짓을 전한 것일까? 자신도 자신이 죽기 전에 예수 재림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상기하였다. 곧 예수 재림신앙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쉽게 미혹에 빠진다는 것을 말이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 2:3).” 그것은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2).” 재림신앙의 목적이고 핵심이다. 이를 버리면 굳이 깨어 있을 이유가 없다. 느긋하고 나른해진다. 뭉개고 미루며 설마, 한다. 이를 너무 광적으로 신봉하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이단들이 이 날이다, 저 날이다 하는 모든 것은 거짓이다. 분명히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재림신앙을 바란 것은, 마치 죽음도 그러하지 않은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그 날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알 수 없음으로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은 예수 재림신앙이다. 이를 너무 가까이 끌어와도 또는 너무 멀리 두고 설마, 하는 신앙으로 살아도 문제다. 이는 두려운 일로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40-41).”

 

그때를 알 수 없으니 모르는 척 사는 게 나을까, 오늘이라 생각하고 사는 게 나을까? 예수 재림신앙은 고단한 삶을 견디게 한다. 하루하루 매순간을 주께 의지하게 한다. 우리들로 그리스도 안에 살게 한다. 이는 새 피조물이 되는 일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곧 우리는 그가 만드신 것임을 알게 한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이는 아무나 믿거나 마음에 둘 수 있는 게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으로만 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그러한 우리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삶을 산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재림신앙을 가진 사람은 안다.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곧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하는 말씀을 붙들고 살 수 있는 자들이다(요일 3:1-3).

 

그러니 남들처럼 가진 게 없어도, 또는 실패와 또는 좌절이 몰아친다 해도, 우리로 참고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은 예수 재림신앙이다. 이를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 전하였고 자신도 믿었으며 오늘 날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지금일지 언제일지 알 수 없으나 ‘곧’ 그러할 것을 믿고 사는 일, 이를 바울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할 때 베드로의 설교가 뒷받침한다. 즉 우리 신앙의 인격은 재림신앙을 기초 할 때 우리는 ‘더욱 힘써’ 바른 신앙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먼저는 믿음이다. 그 믿음을 덕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의 덕은 무엇에 대한 덕인지 바로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 성경이다. 말씀이 곧 증거이고, 말씀만이 교훈이 된다. 예수님도 모르신다 하고 바울도 알지 못하였으나 재림신앙을 견지하였던 것은 ‘그날이 언제다!’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언제든 그날을 준비하는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에 절제가 필요하다. 많이 아는 자의 나른한 신앙은 저를 병들게 한다. 절제는 인내가 있어야 한다. 참지 못하는 절제는 극단적인 광신자가 되게 한다. 그 인내는 경건이 따라야 하고 경건에는 실제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 곧 형제를 위하는 마음이 같이 한다. 그리하여 사랑은 느낌이 아니라 행함이다.

 

하루를 사는 데 있어 이와 같은 신앙이 또 하루를 견디고 절제하고 덕을 이루며 믿음으로 살게 한다. 그런데 바른 지식이 없을 때 죽은 자에 대한 엉뚱한 지식들이 남발하고, 그래서 처녀로 총각으로 죽으면 구천을 떠돈다거나 제삿밥을 먹으러 그의 혼들이 온다거나 하는 헛소리들이 난무하다. 성경은 그리 이르지 않으셨다. 죽은 영혼이 갈 곳은 하나는 이쪽 하나는 저쪽뿐이다. 왕래는 있을 수 없다. 저들이 산 자의 땅에 올 수도 없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말씀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부자는 저쪽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를 알아보고 물 한 방울을 원했다. 그럴 수 없었다. 그럼 죽은 자를 보내 아직 산 자들에 이 사실을 알게 하고자 아뢰나 그럴 수 없다. 그럴 걸 요즘 누가 죽었다가 천국에 갔었다는 둥 천사를 만나 저들이 어쨌다는 둥 하는 책이나 영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돈이 된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다투어 그런 자의 간증을 전하게도 한다. 나는 저의 말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자의 고단함과 별반 달리 들리지 않는다. 신비를 무시하지 않으나 그것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설령 죽은 자가 살아날 수도 있고, 저가 죽었던 몇 날 몇 시 동안에 신비로운 체험을 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뭐? 나는 차라리 오늘 요엘 선지자의 말씀이 더 귀에 들어 온다.

 

“보라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 가운데에서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가 반드시 온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내시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하리로다.” 이는 실제 두렵고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일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시리로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신앙이 있다(욜 3:1, 16). 바울은 이를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하고 있는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 그런데 꼭 이런 말씀을 두고 호기심 많은 상상력은 나팔이 어떤 모양이고 어떤 의미인지? 그게 오늘 날 무엇인지? … 천사장은 누구일지? 저의 모습은 어떠할지? … 엉뚱한 상상력은 말씀의 본질을 흐리고, 호기심은 마치 믿음 좋은 자의 필수적인 요소인 것처럼 파고들다… 엉뚱한 길로 사로잡혀 그릇 행하여 이단이 되고 사이비종파로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날이 분명히 온다는 것이고, 그게 언제일지 모르나 우리는 매순간 준비하는 사람들로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이 된다. 당시 구약시대 요엘이 복음을 전하였던 척박한 현실은 ‘메뚜기 심판’을 예언하며 저들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었는데, 오늘 우리에게 재림신앙이 그와 같다.

 

그러니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오늘 시편의 강조점은 명료하다. 누가 봤다, 들었다, 갔었다 하며 떠들어 대도… 혹은 귀신에 대해 알지 못함으로 샤머니즘에 젖어 혼령들이 어쩌고 하며 자신들이 사는 세상이 혼백들이 같이 산다고 미친 소리를 해단다 한들… 말씀은 엄연하게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시 20:7-8).” 결론은 말씀이다. 말씀이 오늘 나의 엉뚱한 상상과 호기심에 제동을 건다. 괜한 의구심에 마침표를 찍게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는 있다. 성경만이 옳다. 누가 죽었다 살아서 누굴 만났고 천국 어디를 갔었든지, 말았든지, 따라서 저에게 구할 것은 없다. 서로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으나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성경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 20:1, 4).” 그리하여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