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박국 1:13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시편 45:6
하나님은 악을 용인하실 수 없고 죄를 방관하실 수 없다. 그래서 하박국은 의문을 제기한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그는 앞서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먼저는 의인들 때문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4).” 다음은 죄인들의 어리석음을 향한 것이다.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16).” 의인들은 해이해졌고 악인들은 그물에 제사하고 투망에 분향한다. 도구가 신의 자리를 차지하여 모든 곳에 영혼이 깃들었다고 떠들어대는 것들이다. 무슨 일에 앞서 고사를 치르고 그 앞에 절하며 잘되기를 기원하는 행태다.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15).” 이와 같은 일은 문화가 되었고 저마다 액운을 쫓고 행운을 바라는 처사가 되었다. 이에 올바른 관계가 이뤄져야 할 것이고, 그에 따른 인과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도 우리들로 부르짖게 하신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꼼짝도 하지 않으시니 저마다의 궁여지책인 셈이다.
믿음이 약해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오랜 침묵인데, 실제 하나님은 침묵하신 적이 없다. 그때마다 말씀으로 오셨고, 곁에 누구를 두어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거나 일련의 사태를 표징으로 보이시기도 한다. 그럼에도 침잠한 영혼은 이를 분간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하는 대로 저들을 따라 살아갈 뿐이다. 무덤덤해진다는 것은 악을 행하는 일보다 더 고약한 것 같다. 하박국은 주께 질문을 하고 답을 기다린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2:1).” 묵묵히 주어진 일상에 충일하다는 것은 확신으로 가능하다. ‘하나님이 오직 이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강하게 붙들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서서히 드러나게 돼 있다. 나는 언제부턴가 무던한 사람이 좋다. 즉흥적으로 이랬다가 또 언제 연락이 되어 어찌 되어가나 하고 물으면 전혀 다른 일을 구사하고 있을 때 나는 당황한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사연들이 있지만, 본래 모든 변덕은 숱한 사연의 결과다. 그럴 때면 뭐라 다음 말을 섞기가 석연치 않다. 어차피 흘려버릴 말에 대하여 기대를 거는 것보다 ‘그런 사람’으로 놓아두는 게 낫다. 모름지기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 나의 날들에 따른 인과관계도 달라졌다는 것은, 어떠했든 하나님이 주도하신다. 이뤄 가시며 성취하신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는 소리다.
진리에 대하여는 단호하고 이를 행함에 있어서는 겸손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었다. 진리는 진리다. 세상이 두 쪽 나도 변할 수 없다. 내가 감당할 수 없어도 진리다. 그것으로 내가 살 수 없다 해도 진리다. 이를 알면 알수록 주께 의뢰한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고 이행할 수 있고 다다를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나는 요즘 강하게 붙들려 있는 말씀이 있는데,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하는 것이다.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기뻐하라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 ‘여호와로 인하여’ 그러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시는 그 길에서 묵묵히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이다. 근심하면 언제나 나의 심령을 상하게 한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시 77:3).” 하지만 내가 근심하는 것도 주가 들으신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55:17).” 성경은 일제히 소리를 높여 그리 전한다.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애 3:32).” 결코 우리로 근심하게 하심이 저의 본심이 아니시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33).” 그렇다면 근심하지 않는 게 중요한데, 근심하지 않으려고 다른 수단을 찾아 '그물에 분향하고 낚시에 제사하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다. 뭐라도 해보려할 때 돈 되는 일이 왠지 진리 같다.
믿는 자도 근심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그러나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겔 3:14).” 때로는 세상보다 하나님께 뿔딱지가 날 때도 있지만, 그럴 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확신이었다. 확신은 말씀을 붙들 때 오고, 말씀의 일관된 증거는 나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그리하여 늘 내가 힘이 되는 한 구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그렇게 나는 친구와 통화하다 병드신 아버지를 모시고 모처럼 가족들이 여행을 간다고 할 때, 주의 평안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려움의 목적은 주께 돌이키라는 데 있다. 주의 자녀는 돌아오고 악한 무리는 하나님을 배척한다. 우리에게는 주를 의지할 수 있는 유전인자가 있다. 내가 어찌 주를 의뢰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굳이 알 것도 없이 거저 안다. 앎으로 주를 의지한다. 이는 우리의 권세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다.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삶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그래서 근심이 늘 우리를 물고 뜯는다 해도, 이 권세를 빼앗을 수 없다. 이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수고하여 취한 게 아니다.
이런 말씀을 묵상하고 누구에게 말해주다 보면 내게 더 힘을 얻는다. 나는 저에게 일러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하는 데 관심을 두고자 한다. 우리가 주의 성품 곧 그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이를 위하여 깨어있어야 하고 더해야 할 것은,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5-7).” 믿음이 다가 아니다. 사탄도 믿고, 사탄도 '광명한 천사'로 산다! 그런 것과의 차별은 믿음에 덕을 세우고 덕을 위해 더해야 할 지식을 가진다. 하나님을 바로 알되 그 지식에는 절제가 필요하다. 인내 없이 연마는 없고 연마가 없으면 성장도 없다. 인내는 경건을 추구하고 경건은 실제 형제우애로 나타난다. 내가 저 애를 왜 사랑하는지, 난 알 수 없다. 주의 사랑이 더해지는 것이다. 가령 아주 오랜만에 한 친구와 통화가 되었고 조만간 보자, 하는 인사에 그러려니하였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전에 같이 즐기던 것이 이제는 달갑지가 않은 것이다. 이와 다르게 누구와는 만나고 싶다. 통화도 자주 하고 싶어진다. 단지 우리의 사는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의 삶에서 ‘하나님의 일’을 말할 때면 말이다.결국은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서였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그에 따른 필연적인 게 기도다. 누구와 통화하다, 어디를 걷다, 무슨 생각에 젖어있다 문득 사로잡히고 붙들리게 되는 것.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그러할 때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45).” 주의 인자하심과 의로우심을 확신하게 된다. 나는 할 수 없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하시는 이에게,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 하시는 일이었다. 다만 묵묵히, 나는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았을 뿐이다. 거기에서 차별이 없으심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때로는 처해진 상황이 너무 답답하여, 오늘 하박국처럼 주께 묻기도 하지만,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합 1:13).” 그 대답은 너무 명쾌하고 분명하게 들려온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시 45:6).”
더는 다른 데 기웃거릴 거 없고, 근심하며 주춤거릴 게 아니며, 혹시나 하고 누굴 바랄 것도 없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러므로 하루와 하루가 더해지면서 '나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나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짐을 확신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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