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하박국 2:13-14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편 46:1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말씀이 나를 붙든다. 무엇으로 우리의 이 고단한 삶을 위로할까?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하시는 오늘 하박국 선지자의 전함이 크게 다가온다. 다들 곧 불 타 없어질 것으로, 그처럼 평생을 바쳐 산다.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다. 저마다 산다고 사느라 그렇다는데,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수고로움이고, 이를 통하여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합 2:13-14). 누구는 이를 바로 알아 온전히 주를 바라게 되고, 누구는 온갖 잡신을 끌어다 위로를 삼고, 누구는 단지 롯의 사위 둘처럼 ‘농담으로나 듣는다.’ 나는 누구와 이야기하다 저의 지나온 삶의 이야기로 안타까웠다. 이를 말로 옮길 수 없음은 행여 나의 글이 저의 마음에 슬픔을 더할까 두려워서이다. 그리하여 혹시 그 친구가 이 글을 읽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하는 오늘 시편의 말씀을 전하여주고 싶다.
우리는 단순히 사는 데 따른 어려움을 덜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게 아니다. 죄사함이 전부가 아니라는 소리다. 이제 시작이다. 종교는 삶의 위로를 더하는 것으로 족하나 내가 믿는 기독교는 삶에 삶을 더하여 영생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한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말씀을 바로 알지 못할 때 기독교를 종교 중 하나로 삼을 따름이다. 복음을 사는 데 따른 위로의 정도로 여길 따름이고, 이 땅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어 발판을 삼을 뿐이다. 그게 전부이면 굳이 복음이 아니어도 되고 타종교, 다른 신이면 어떻겠나? 당장 나에게 위를 주는 것이면 족하고, 그것을 위해 부적이면 어떻고 십자가이면 어떻겠나?
화있을진저! 오늘 하박국 선지자는 서너 개의 경고를 더함으로 그릇된 길 위에 바른 길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 하나는, “그는 술을 즐기며, 거짓되고,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말씀 그대로다(5-7).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는 술을 즐긴다.’ 위로 받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거짓되고, 교만하다.’ 거짓과 교만은 앞뒷면의 동전과 같아서 하나로 간다. 남을 속이고 사는 것 같으나 자신에게 거짓된 위로로 답을 더한다. 이것이 교만이다. 저는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스올처럼 자기의 욕심을 넓힌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아니면 이 미칠 것 같은 현실을 이겨낼 수 없어, 저의 나날은 ‘스올처럼’ 그의 지옥은 확장되어 자신의 욕심을 넓혀가고, 가진 것으로는 만족함을 모른다. 그러니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른다.’ 어떤 것으로도 그 영혼의 위로를 얻지 못함이다.
더, 더 ‘자기에게로 여러 나라를 모으며, 여러 백성을 모으나니!’ 그것은 사람들만의 위로일 수 있다. 자기들만의 나라, 자기들만의 세계일 수 있다. 이에 동조하고 공감하는 자들로 자기 만족을 대신하려 하지만,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무슨 말일까? 다들 그러고 사는 거지 뭐? 하는, ‘속담’은 겉도는 말들이 삶을 축약하여 응축한 말의 세계다. 말은 위로를 쥐지 못하고, 시는 은유로 노랫말을 지어 부른다. 그래서들 유행가 가사가 자기들 이야기 같아 위로가 되고, 트롯의 구슬픈 노랫말이 눈물을 찍어내게도 한다. 아, 그러나 ‘곧 이르기를 화있을진저!’ 그 위로는 금세 또 목마르다.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남의 다리 긁는다고 애써 수고하였으나 괴롭기는 마찬가지 인생이었다.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정작 자신이 부여잡은 줄 아는 삶에서는,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그 영혼은 따귀 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하고, 멱살 잡혀 끌려가는 것처럼 꼴이 말이 아니다. 그러니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좀 나아졌다, 여기며 이제 살만하다 싶은 곳에서 도로 시작인 것이 인생의 괴로움이라. 거기서도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인생은 어디에도, 그 무엇으로도 나를 숨길 수가 없다. 내 영혼은 평안을 누릴 길이 없다. 다시 되풀이 되어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나는 그저 본문 그대로 가져와 읽고 음미할 따름인데,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2).” 하박국에게 하신 말씀이 오늘 내게 들려주시는 것만 같다.
토요일에 가족들은 다들 집을 비웠다. 아내와 딸은 볼 일이 있어서 이른 점심을 먹고 동대문에 갔다. 아들은 토익 시험을 치르러 갔고, 나는 남아서 설거지를 하였다. 다시 교회로 갈까 하다가 우연처럼 아주 오래된 친구로부터 카톡이 들어왔다. 잠깐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정도일 줄 알았는데, 저의 구구한 인생 여정은 참으로 기가 막혔다. 문자로 들려오는 저의 사연들은 가친 숨소리까지 들리는 듯하여 턱턱, 숨이 막힐 정도였다. 나는 그때마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이 말씀을 판에 새겨, 달리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는 수밖에!’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저마다의 사연은 상대적일 수 없고 절대적인 그 고통은 사는 데 따른 고통으로 오롯이 저만의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되돌려 되새길 수 지나간 세월을 가늠하느라 숨이 차다.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히 누려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나는 속으로라도 저에게 여러 번 되뇌며 알려주었다. 어쩌면 그 날을 더 간절하게 바라고 살게 하시려고, 그 날이 더욱 더 영광되게 하려 하시려고, 오늘 우리 인생의 고단하게 허용하신다.
오늘 하박국은 그리 명시하고 있어,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3).” 그러면 이 모든 상황과 누구에게 감히 말할 수 없는 사연으로, 우리에게는 바라시는 한 가지 일만 남게 되는 것이다. 살려주세요! 주님, 도와 주세요!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4).” 오직 주를 바라는 믿음으로였다. 아니면 살 수가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밖에는 더 좋은 길이 없는 것만 같다. 그처럼 늘 자살충동에 시달렸던, <샘물과 같은 보혈은> 찬송가 가사를 쓴 윌리엄 쿠퍼의 진솔한 고백을 메모해둔 게 있다.
주여, 제 사랑 작고 약한 것이
큰 불만이오나
그래도 주를 사랑하고 경배하오니
오, 더 사랑하는 은혜를 주소서
-윌리엄 쿠퍼
한데 더 큰 문제는 스스로 숨어서 잘했다 위로하려 하는 마음이다.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있을진저!(9).” 어째서 그런가?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10-11).” 이를 풀어보면,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한다.’ 그 수단이 돈이면 어떻고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이 어떻겠나? 더 높은 것을 위한 수고이고, 그곳에 깃들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위로를 얻을까 하여!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게 된다.’ 오늘 우리 사회의 가장 단적인 예가 아니겠나? 지상의 방 한 칸을 위해 사는 게 목적이 되었다. 저마다 이를 투자라 하여 정신없이 밥벌이를 하고 사느라 기진하여간다. 그러나 ‘그러는 자에게 화있을진저!’ 그 수고가 헛되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기 위해서 또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집 한 칸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야 하고, 교묘하게 법을 피해 나름은 정도껏 한다지만, 그 영혼이 죄를 범하는 것이라면! 왜? 주식을 하니 눈만 뜨면 주식판에 마음이 기울고, 사업을 하니 입만 열면 그 일 타령으로 혀가 마르고, 장사를 하니 사람들에게 굽신거려야 하고, 회사를 다니니 아니꼬와도 영혼까지 탈탈 떨어서 빚을 내어 살아가는 꼴이다. 자고 나면 억, 억, 하고 오르는 집값으로 행복하신가? 다들 주를 바랄 겨를이 없는 삶이다. 그러니 무생물인 집과 주식의 숫자가 우리 영혼에 호소한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일깨워도 일깨워도 깨어나지 못하는 영혼에게, “피로 성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있을진저(12)” 부디 두렵고 떨림으로 인생을 가만히 돌아보아 그래서 어떤 날이 그리도 좋았었는지? 한 번이라도 평안한 날이 있기는 하였었는지를 살펴보기를. 아, 그러니 이 모든 발광을 어쩌면 좋을까? 결국 배후에는 주의 영광이 계셨음이었다.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오늘 하박국은 자신을 불태워 산다고 사는 그 삶에 고단한 우리에게 묻는 것 같다(13). 그리고 일깨운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14).” 이내 우리 영혼은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기까지’ 우리의 세찬 파도와 거친 풍랑을 거듭 되풀이 해야 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20).”
나는 친구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말로 위로하였다. 달리 내가 전할 수 있는 위로가 없었다. 오후 내내 마음이 어려웠다. 잠자리에서도 그의 인생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 덩달아 서러워서 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나는 저에게 부디 세상의 위로로 그 영혼의 위로를 삼지 말기를 바라고 또 기도하였다. 오늘 본문이 경고한다.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있을진저!” 여태 내가 의지하고 살던 세상이 주었는 위로는 결국 우리의 부끄러움을 들추고 그것으로 오히려 분노를 더하였을 뿐이다(15). 사느라 다들 사는 일에 미쳐 있는 까닭도 그것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16).” 지나고 나면 씁씁한 것은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곧 자신이 위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부터 번번이 거절당하는 영혼이라. 번번이 그러면서도 다시 또 세상을 붙드는 삶이라니!
부디 그 상한 심령에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 이는 이 땅의 이치다. 저마다 믿고 섬기는 이 땅의 헛된 우상이다.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17).” 그렇게들 스스로가 자신이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는 저에게 차마 여기까지는 말할 수 없었다(18). 언제까지 우리가 헛된 것으로 위로를 삼아 더 높이 깃들어 숨을 수 있을까?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19).” 그것들은 아무 위로도 위안도 줄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덧없음이라. 어, 인생조차 깃들 수 없는 덧없음인데 하물며 우리의 존귀한 영혼을 어찌할꼬?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20).”
나는 사실 할 말이 많았다. 저의 사연을 듣고 마음이 먹먹하여 내내 어려웠던 생각들을 풀어낼 거였다. 새벽 두 시, 세 시 반, 네 시… 뒤척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일어나 앉아, 이처럼 말씀 앞에서 앉았을 때, 입을 다물게 하신다. 그리고 말씀은 가장 시의적절하게 내 안의 답답함을 하박국을 통하여 들려주고 계신다.
아,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행여 그 친구가 이 글을 읽는다면, 부디 ‘나에게 들리는 것이 저에게도 보이기를. 나에게 보이는 것이 저에게도 들리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또 바란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10).” 그러하기까지 오늘의 이 지랄발광 같은 세상은 결코 전부가 아니고,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기어이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주의 영광 앞에 세우실 것이다. 오늘 더하시는 이 단내나는 고단함과 잔인함은 이로 인하여 주의 영광을 더욱 주의 영광으로 인정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시 46:2-3).”
그리하여 나는 주의 이름만 부른다. ‘그 이름’ 나의 성은 견고하여,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5).” 나는 이처럼 말씀 앉아 주의 영광을 본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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