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3:17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 50:15
주의 인도하심을 느낀다. 곁에 계시고, 함께 거하시며, 늘 잠잠히 나를 사랑하시는, 성령의 손길이 오늘도 말씀 앞에 앉게 하신 후,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그러니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16).” 시무룩하여 기운 잃을 게 아니다. 말씀은 나의 어깨를 흔드시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가 나를 건지시고, 이를 영화로 삼으시는 하나님.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와 같은 주의 사랑이 내 것이었다. 비록 삶은 우리를 속이고 노엽게 하나 푸시킨의 시처럼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다시는 우리가 무서운 종의 영을 받을 리 없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누구는 자신도 코가 석 자나 빠졌으면서 나의 잇몸 치료에 좋다는 영양제를 보냈다. 친정과 시댁의 양가 어른들을 수발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도 나에게 주소를 묻고 무슨 약을 택배로 보냈다고 하였다. 저에게는 기도 수첩이 있다. 자신의 거친 삶으로도 휘청거려 견디기 어려울 텐데, 중보하며 누구를 위해 기도하다 새 힘을 얻는다는 것을 안다. 바울의 고백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우리가 사는 게 우리가 사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저의 마음을 받았다. 주님의 마음인 것을 안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4:15).” 곧 내가 주의 자녀인 것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그것이다. 성경은 이를 증명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데도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행세하게 하는 사탄의 수가 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저들은 자기 스스로의 만족으로, 주를 섬기지 못하고 그러는 자신을 섬긴다. 그것으로 자신하며 남에게 보이기를 좋아한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시 50:21).”
그러나 성경은 우리 자신의 행실과 거짓과 오만함과 연약함으로 불만을 느끼는 것 자체가 주의 자녀인 것임을 논거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마음이 가고, 기도를 모으며, 할 수 있는 씀씀이를 더한다는 소리다. 언제부턴가 자기 자신에 대한 기도는 줄어들었다. 이는 주께 맡긴 것이다. 그 자리를 남의 사연과 남의 어려움이 차지하였다.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누구를 생각한다. 저의 억눌린 영혼을 두고 주께 아뢴다. 주의 긍휼하심을 대신 저를 위해 바라게 되는 것인데, ‘자기 코가 석 자’인데, 시쳇말로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인데,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이렇듯 구별된다. 뭐가 달라도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보기에는 어떠할지 모르겠으나 우리 안에 곤고하고 궁핍한 ‘한 영혼’이 맡겨진 것이다. 저의 지금 사정을 빤히 알면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받는 것은 주께서 그리 하심이고, 주의 마음이며 주의 사랑인 것을 아는 까닭이다.
종종 누구에게 ‘받지를 못하면 주지를 못한다’고 한다. 스스로 가만히 생각해볼 것은 자신이 인색한 경우는 받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주의 손길인 것을 알지 못한다. 늘 그 기도의 중심내용이 자기 이야기인 사람이다. 저에게는 남을 위한 기도가 어렵다. 늘 자기 살 궁리에 여념이 없다. 그의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그야말로 '내 코가 석 자'라. 실제로 석 자씩이나 질질 흐르는 자기 콧물을 훔쳐대느라 다른 데 마음 쓸 여력이 없다. 그런 자의 신앙은 팍팍하고 은혜가 없다. 그러니 하나님은 인색하시기만 하신 것 같다. 바라는 것은 많고 해주시는 건 별로 없는 옹색한 신 같다. 그와 같은 오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말씀이 막혔고, 하나는 기도가 막혔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성령의 교통하심이란 곧 주와의 사귐이다. 이게 원활하지 못한 까닭은 의외로 간단한 이유다. 말씀을 접할 기회를 잃는다. 정해놓고 읽는다고 해도 건성이라, 숙제처럼 지겹다. 오늘도 해치워야 하는 일처럼 여겨질 때, 말씀은 맨송맨송하다. 그저 남의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다윗의 사연이, 모세의 거친 숨소리가 내 이야기로 다가오질 않는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막혔다.
그러할 때 주의 자녀에 대한 성령의 처분은 둘로 나타난다. 억제와 압박이다. 그 목적은 간단하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우리로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억제하심은 강제하시는 것으로 더는 내 뜻대로 못하게 하신다. 잘되던 일이 자꾸 엉긴다. 이상하게 마음을 두고 손만 대면 일을 그르친다. 마치 발락에게 가는 발람의 길을 막으시고 저의 나귀의 입을 열어 꾸짖으신 것처럼, 하는 일마다 곡소리가 난다. 그렇다고 도덕주의자로 만드시려는 게 아니다. 주의 뜻을 알게 하려 하심인데 그러자면 말씀 앞으로 끌어다 앉히실 수밖에 없다. 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종종 나는 할 게 없어서 말씀을 본다. 내 일은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일이라, 일주일 내내 말씀을 준비한다. 누가 들으면 웃을 일이지만 주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이는 말씀에서 나를 만나 교통하시고 싶으신 것이다. 우리의 사귐은 말씀으로다. 내 안에 주 외에 다른 의지의 대상을 하나님은 질투하신다. 그래서 때로는 나의 정신과 마음을 압박하신다.
가령 복음을 전하려는 일념으로 저들은 아시아로 길을 잡았다. 그런데 이를 틀어막으셨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 16:6-7).” 이러면 우리 안에는 회의가 든다.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대체 무슨 꿍꿍이실까? 나더러 어쩌라는 것일까? 불만이 일기도 한다. 그렇게 막막할 때, 다른 궁리를 하며 나름의 개선책을 찾는 것은 어리석다. 말씀 앞으로 이끄시는 주의 강권하심을 알아야 한다. 억지로라도 앉히신다. 말씀과 기도로 단련되지 않는 신앙은 모두 허사다. 열심으로는 사탄을 따를 수 없다. 저는 늘 우리보다 빠르다. 내 안의 염려와 불안이 나의 행함보다 앞서는 것과 같다. 또는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희생으로도 감당할 수 없다. 말씀밖에 길이 없다. 기도로만 나아갈 수 있다.
나는 자주 그런 경험을 한다. 그리고 이제는 이상할 정도로 즐거움을 느낀다. ‘이러고 있는 시간’이 좋다. 하루 일과 중에 내가 꼭 지지고 싶은 시간이 새벽 이 시간이 되었다. 작은 집이라, 공간도 마땅치가 않아 베란다에 작은 책상을 두고 나는 묵상을 한다. 기온이 떨어져 외투를 걸치고 작은 스탠드를 켜고 발밑에는 조그만 온풍기를 돌리고 앉았다. 환경이 제약이 될 수 없다. 나도 실로 이러한 나의 즐거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 좋은지. 뭐가 좋은지. 주가 하시는 게 아니라면 나는 이 좋음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이 시간을 위해 하루를 사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읽는 책과 누구와 나누는 대화와 어떤 생각과 마음을 어렵게 하는 일들까지도 모두 적어둔다. 그래서 이 좁은 책상 위에는 전날에 메모한 이면지종이들이 너저분하게 펼쳐졌다. 그때마다 나는 ‘말씀 앞에 물어봐야지!’ 하는 것이다. 부족하지만 이를 글로 작성하고, 이 글은 모아져서 설교원고의 초안이 된다. 또는 누구와 대화할 때 주의 마음을 전달하는 밑천이다. 실의에 빠져 팔이 축 늘어질 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습 3:16).” 오늘 말씀처럼 말씀이 나를 붙드시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그와 같기를. 그렇게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17).”
아,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가슴 벅차다. 울컥, 하고 마음의 위로는 영혼을 달랜다. 누구를 생각하고, 힘들어하는 저의 삶의 무게를 주께 대신 아뢴다. 말씀 앞에 앉히심으로 기도가 나온다. 내 문제는 더 이상 문제도 아니다. 내 일에 연연하지 않게 하신다. 이는 모두 주가 맡으신 까닭이다. 그래서 누가 물으면, 구체적인 증거 하나는 말씀을 가까이 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이는 매우 특별한 인도하심이다. 때론 억제와 압박으로 나를 누르시기도 한다. 붙들어 두시기 위해 불안과 육신의 고통을 더하시기도 한다. 왜?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것은 말씀 곁에 있게 하심이다. 기도하는 시간이 생긴다. 은혜 안에 거한다 하는 것은 기도가 일상이 되고 말씀이 대화로 사귐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나는 다급할 때,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면서, 주님! 하는 외마디 부름 속에 모든 마음을 담는다. 어찌 다른 말로는, 어떤 수사어구로도 표현할 수 없어 주여, 하고 부르고 먹먹한 심정으로 다음 말을 잇지 못할 때,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이 놀라운 경험이 일상이 되었다. 성령 충만이란 무슨 신비로운 요술이 아니다. 종종 우리의 오만함은 하나님과 다투듯 힘을 견주려한다.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어요? 하는 심정인데, 오늘 시편은 그러는 우리를 어이없어 한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시 50:21).” 곧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또한 주의 길을 간다고 하면서 늘 자기 이야기, 자기 삶에 함몰되어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22).” 이를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감사를 회복해야 한다.
아내는 코로나 대응 2.5단계로 격상된 방역조치로 인해 공부방 아이들 멈추었다. 당장 수입이 없으니 한숨이 절로 나올 일이다. 일이 없으면 우울해하는 아내에게, 나는 더 감사한 일을 묵상하자고 말한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23).” 돌아보면 감사하지 않았던 시절이 어디 있었던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오늘의 이 모든 어려운 처지도,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게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5).” 그렇게 우리로 말씀과 기도로 인도하심이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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