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며 손을 흔들리로다
스바냐 2:1, 15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20
수치를 알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 부끄러워하는 것은 사람의 본분이다. 처음 사람도 그러했다. 저들은 먹지 말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후에 그 낯을 피하여 숨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찾으실 때,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9-10).” 아무리 죄를 지어도 이를 수치스러워하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 하고 다소 낯설게 출발한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며 손을 흔들리로다(습 2:1, 15).” 이를 두고 시편은 일갈한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그렇게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12-13).”
이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라면 믿는 사람들의 길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살면서 죄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할 때 설령 믿는 자로 살면서 부끄러운 죄를 저질렀다 해도 스스로 망했다고 단정 짓지 않는다. 더는 소망이 없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언하시는 대언자가 계심을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이를 요한 사도는 한 번 더 강조한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곧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음을 안다는 소리다.
둘째, 죄를 지었다고 해서 어떤 억눌리는 두려움에 매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둠으로 끌려들어가지 않는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7-18).” 우리에게는 우리도 알 수 없는 담대함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16).”
셋째, 만약에 죄를 짓고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준이 무너졌다고 자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부하던 긍지나 자신의 이력이 훼손됐다고 여겨 스스로 결단하려 드는 것은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였음을 증명할 뿐이다. 가령 가룟인 유다처럼 말이다. 저는 잘못된 것을 알고, 스스로 이를 결정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 27:5).” 우리 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거하신다.’는 확신이 있다. 우리의 죄성이 우리로 죄를 짓게 할 때 이를 죄라고 인식하고 자중하고,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게 당연하다. 그것이 진리의 충만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넷째, 어떤 기준을 강조하며 이에 어긋난 자신을 자책하는 일은 율법주의자다. 스스로 그만큼 의로운 줄 안다. 그렇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께 송구하고 부끄러워 괴로워할 줄 아는 것이 바른 하나님과의 관계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을 고르라면 다윗이다. 저는 유부녀 밧세바를 간음하였고, 이를 은폐하려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를 시치미 떼고 무마하려 저를 데려다 살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나단의 지적에 저는 죄를 부끄러워하였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이는 하나님께 대한 비통함과 회개로 괴로움을 호소하는 것이다. 마치 탕자처럼 뒤늦게 아버지의 집을 떠올리는 게 자녀 된 자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눅 15:18).” 그렇듯 우리에 대한 주의 사유하심을 우리로 인정하게 하신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시 130:4).”
다섯째, 그리스도인이면 아무리 죄로 수치심을 느끼고, 괴로움으로 질식할 것 같다고 해서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판단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괴로움을 당하고 자책과 죄의식을 느끼며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다. “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6).” 그럴 때 우리는 절대 우리의 도덕성과 그동안 쌓아온 이력, 자긍심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 바울은 자신을 자신조차도 정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
여섯째,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이를 통하여 내 속에 성령이 계심을 확신한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이를 알 수 있는 것도 우리의 지식이나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 어찌 내 안에 본래부터 주어진 바, 하나님의 비밀이다.
일곱째, 믿는다고 떠들고 자부하고 자긍하는 게 믿음이 아니다. 그런 믿음은 귀신들도 가졌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그런 자들은 어떤 죄,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때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한다.’ 스스로 살 길을 찾는 까닭이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성경은 이를 단호하게, 적그리스도라 하신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18).” 결국 교회를 나가고도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긍하는 자들이 늘어나는 시절이다. 물론 저들도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말씀대로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산다고 살았겠지만 그게 여의치 않은 세상에서 이런저런 살 궁리를 하다보니 자구책을 찾은 것인데, 그리 타협하는 현대판 그리스도인들이 늘고 있는 추세다. 특히 코로나 사태로 신앙은 확연하게 양분되고 있다. 저들은 할 거 다하고, 남들처럼 추구하고 살면서도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한다. 특히 누구는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주셨다며 계시를 들먹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4:1).”
그럼 우리 안에 이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첫째, 나의 나 된 것이 주의 은혜라는 것을 우리는 미약하더라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때론 희미하여 긴가민가 하면서도 주의 은총을 인정한다. 주 없이 살 수 없음을 우리 삶의 행태와 달리 우리의 영혼은 안다.
둘째, 비록 그렇게 바로 살지 못할 때가 더 많다 해도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다시 말하면 내가 내 인생을 개척하고 꾸려가려 하지 않는다. 내 문제에 너무 연연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너무 어려움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는다.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럴수록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여기는 ‘자기주도적인 삶’을 지향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안다.
어제는 누가 공황 증세를 호소하였다. 코로나19 여파로 스트레스가 다들 팽창하는 시절이다. 기본적인 생활은 위협당하고, 저마다 어려움에 처해서 스스로 어찌 해보려 하다 턱, 하고 한계에 부딪칠 때 공황은 순식간이다. 보면 늘 강단 있고 추진력 있게 자기 일을 잘한다고 여겼던 사람들이 주로 그렇다. 그럴 때 우리는 몇 가지 독특한 경험을 하는데, 나는 이것까지도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첫째, 자신만 남겨졌다는 느낌이 든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골방에 갇힌 셈이다. 따귀 맞은 영혼이 이런 경우이다. 비참한 심정뿐이다. 도대체 구제할 길이 없다. 더는 의지할 것도 없다. 처음 예수를 영접하고 기뻐했던 기쁨을 모두 잃어버린 것만 같다. 그동안 자기 힘으로 살았고 애써 수고했는데 돌아오는 결과는 자괴감 뿐이다. 이때는 마치 하나님도 나를 상관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더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된다. 처음에는 내가 어떻게 섬겼는데? 하는 식으로 시작하다, 내가 범하고 살았던 민낯을 감출 수 없어 실토하게 된다. 가령 삭개오는 예수를 만남으로 스스로 토설하였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그리 된다. 자신만 버려졌다는 느낌은 동시에 하나님밖에 의지할 대상이 없다는 데로 마음을 끌고 간다.
둘째, 이것으로 우리가 거룩한 자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증거를 얻는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그러니까 그럴 때 주를 생각한다는 것, 우리 안에 그런 생각이 있었다는 것에 오히려 염치가 없어진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 일하시는 말씀 앞에 통회한다. 저절로 그리 된다. 육에 속한 사람은 그리할 수 없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이 지혜를 세상은 알 수도 없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8).” 저들은 듣지도 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한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9).”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우리의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하는 동력이다.“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0, 12).”
셋째, 놀랍게도 우리 안의 영은 우리의 좌절을 통해 우리가 태초부터 이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그럴 때 우리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우리만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간다. 가령 말씀을 읽고 격하게 감동하는 때와 같다. 마치 이 구절의 말씀은 오롯이 날 위해 쓰인 것 같다. 나만의 말씀인 것처럼 여겨진다. 바울의 진술이, 다윗의 노래가 실은 저들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내가 뭘 더 잘 해서가 아니라는 데서 송구할 따름이지만, 그럼에도 신기하게 나의 어려움은 나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한다. 누구의 아픔이 나의 아픔처럼 여겨지며 주의 이름을 되뇌게 한다. 설령 세상으로부터 버려져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이상하게 든든하다. 오직 주를 바라는 마음이 그렇게 신비하다.
오후에 치과를 갔고 마취가 풀려 다시 마취를 하면서 잇몸치료를 하느라 고통이 더했다. 어금니 네 쪽을 다 임플란트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위엣 것은 그나마도 힘들 것 같다는 진단에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우려와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그렇다면 틀니를 해도 되고, 것도 여의치 않으면 그냥 살아도 되지 않나 싶은. 뭐랄까? 걱정과 근심이 동시에 받아들임을 빠르게 했다. 수긍하는 쪽으로 금세 마음이 편해졌다. 어쩔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나는 이 말씀이 참 좋다. 애지중지할 게 우리가 사는 일이 아니고, 이 몸이 아니고, 어떤 문제 해결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무엇인 중요한가를 알았다.
이상하게 나는 오늘 말씀에서 안도한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일지어다 모일지어다(습 2:1).” 하고 부르실 때,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하시는 말씀에서도 나는 예외라는 확신이 있다. 이와 같은 확신이 무슨 용기인지, 착각인지 나는 그것도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용기도, 객기도 아니다. 다들 살아가는 이야기에서 절망으로 처절한 몸부림을 치고, 그것이 안타깝고 안쓰러운데, 그리 느끼는 나의 처지도 별반 다를 게 없으면서도 내 걱정은 별로 깊지가 않다. 물론 그와 같은 불안으로 안정제를 먹어가며 살아야 하는 신세지만 그것도 꼭 나쁘지만은 않다. 누구 말처럼 나의 불안과 공황이 내 곁의 더 아픈 이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동력이 된다. 그것으로 나는 더욱 주를 바란다. 주를 바람으로 나의 일들은 작아지고 남의 사연은 주께 아뢰게 된다.
그렇게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시 49:3).” 그렇다고 나는 죄와 무관한가? 그렇지 않다.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5).” 한데 그런 것들로 나는 나의 한계와 어쩔 수 없음을 호소하게 된다. ‘버려짐’을 느끼면서 동시에 ‘받아들임’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린 스스로의 이 값을 물을 수 없다.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8).” 이를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주밖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안다. 그러므로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 이것은 이제 우리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13).” 우리에게는 저들과 다른 확신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15).” 아무리 저들이 살면서 떵떵거리고 잘만 사는 것 같아도 그 끝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18-19).” 그러니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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