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
스바냐 1:7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시편 48:1
더러 우리는 끝 간 데 없는 이야기를 ‘막장’이라 한다. TV 드라마를 보면서 ‘막장’이라 욕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가파른 시청률로 드러난다. ‘막장’은 그렇게 더는 할 말이 없고, 손 쓸 방도가 없는 것 같이 끝장난 것을 일컫는다. 언제 강원도 태백에 있는 탄광촌을 가본 적이 있다. 갱도 안을 깊숙이 들어가보지는 않았지만 그 끝, 더는 갈 데 없는 굴 속 끝을 막장이라 하였다. 막장은 갱도의 끝이면서 광부들이 거기에서 석탄을 캐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밥벌이를 하는 곳이다. 갱도 끝 최전선에 선 광부는 곡괭이로 벽을 뚫고 나아간다. 뒤 따르는 광부들은 으스러져 떨어져 나온 석탄덩어리를 뒤로 물리며 뒤를 따라서 앞으로 전진 한다. 막장은 끝이면서 시작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또 다시 노숙을 하고 단식을 하며, 청와대와 국회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막장의 정치와 논객들의 시선은 거기에까지 미치지 못하는가, 기사는 간헐적으로 보도되고 만다. 나는 유가족들의 노란 패팅을 볼 때면 눈물이 먼저 고인다. 누구는 이를 정치 공학적으로 판단하고, 누구는 저들을 진영논리에 따라 평가할지 모르겠으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나는 다만 자식 잃은 부모의 억울한 심정, 저들의 막장을 보며 가슴이 저리다. 호소할 곳이 없다. 사람들의 관심은 시들하여졌고, 오히려 싫증내고 괜한 불편함으로 정치공세로 삼는다. 이를 공정하게 처리하겠다던 대통령의 공약은 후퇴하였는지 여전히 답보 상태이다.
누구는 아버지가 치매까지 오셨다며 울먹였다. 근간에 뇌혈동에 대장암에 이제는 치매까지… 저는 부친의 처지가 불쌍해서 애간장이 탄다. 돌아가시기 전에 주를 영접하고 예수를 믿고 구원 받기를 원하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늙으신 모친은 불교 신자라 아버지 곁에서 손이라도 붙들고 기도라도 하면 저이는 ‘아비타불’을 하며 자신이 믿는 부처님의 은덕을 기원한다. 이런저런 사연을 듣다보면 어느 인생이 막장이 아닌 게 없다. 아직 어리고 젊을 때야 모를 일이겠으나 저들도 그때마다는 다 막장이다. 좀 더 좋은 학교로의 진학을 위해 학원으로 내몰리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을 위해 고시촌으로 내몰리고, 직장이란 곳은 밥 벌어먹고 살기가 늘 간당간당하여 죽기 살기로 돈벌이에 내몰린다. 인생이 더해져 나이가 든다는 것은 끝끝내 막장에 서서 곡괭이질을 하여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저의 소식을 듣고 어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뜬금없이 로마서 15장 6절을 적어 보냈다.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6).” 그런 상황에? 막장에 다다라서 우리가 무엇으로 주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바울은 왜 ‘사랑의 하나님’ 또는 ‘인자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르지 않고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것일까? 인생에서 혈육지간의 정이야 인지상정으로 그도 그럴 것이겠으나 우리에게는 그 이상의 관계가 있음을 말해주려는 것이다. 단지 육신의 아버지로 저의 살아온 생애와 그 인생의 막장에 다다라서 겪는 노년의 고통이 불쌍하여 애간장을 태우고만 있기보다 그 가운데서 주의 영광이 함께 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하자는 의도에서였다.
종종 믿음이 좋다는 이들 가운데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에 어색해하는 것을 본다. 중첩되는 인물이 육신의 아버지라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그렇다. 현실에서의 아버지는 무능하고 무력하며 인색했고 변덕스러워서 우리를 고달프게 한 장본인이다. 오늘 날에는 더욱이 부모의 존재감은 상실됐고, ‘아버지 부재’의 시대는 스스로들 자초한 일이 되었다. 자식들에게 더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며, 곧 떠 안아야 하는 짐으로나 여겨지는 시대이다. 하다못해 100여 년 전만 거슬러 가도 비록 가난하고 모진 살림이었다 하나 부모에 대한 효는 갸륵했고 아버지에 대한 존재감은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하여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하나로 놓고 공경하였다. 한데 오늘 날은 그런 관계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성경의 저와 같은 호칭은 그 표현이 '성령께서 일찍이 이를 다 아시고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배려와 은총으로 표현하게 하신' 게 아닐까? 찾아보니 바울은 에베소교회와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도 같은 호칭을 썼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골 1:3).”
베드로도 사용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특히 베드로 사도의 진술에서 나는 왜 그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게 하셨는지, 성령께서는 왜 감동을 더하심으로 이를 서술하게 하셨는지를 묵상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가 아는, 고착된 육신의 아버지의 이미지와는 다른 엄연한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첫째, 그의 긍휼하심으로 독생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다. 둘째, 이를 알아볼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거듭났다는 증거이고 특권이다. 셋째, 우리 안에는 소망을 두셨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넷째, 우리가 받을 유업을 우리 속에 간직하게 하신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다섯째, 이는 이 땅에서의 혈연관계로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곧 감정에 이끌려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것이야 사람의 도리이겠으나, 그것으로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없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요구하는 자식 잃은 부모들의 애끓는 마음을 나는 충분히 공감한다. 또는 기껏 대장암도 잘 이겨내서 좀 나아졌는가했더니 치매가 와서 자식 된 마음으로 속상하기 이를 데 없는 누구의 마음도 이해한다. 그러니 무슨 말로 위로가 될까? 나는 저에게 문득 사도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단순히 추상적인 의미로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이라 부르지 않았다는 데 주목하게 되었다. 성경은 우리의 관계를 재정립하기를 원하신다. 단지 육신의 아버지로, 그 불쌍했던 인생을 돌아보며 막장까지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괴로울 테지만… ‘하나님이 네 곁에 두시는 한 영혼’으로 ‘주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자. ‘주의 사랑’을 달라고 기도하자. 그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오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하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에게는 엄연히 ‘양자의 영’을 더하셨다. ‘거듭나지 않으면 부를 수 없는 아버지’이시다. 누가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겠나? 나는 저에게 그리 말해주고 싶었다.
자식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내 몸도 내게 맡기신 것뿐이다. 나는 다만 맡은 자로 산다. 모두가 주의 것이다. 주께서 그 영혼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 ‘내 양을 먹이라.’ 단지 효를 다하고 존경을 더하여 아버지 부재의 시대에도 저를 공경함이 전부가 아니라는 소리다. 그러다 죽으면 죽은 자를 위해 슬퍼하며 제사를 지내 섬김을 다하라는 어리석은 감정의 호소가 아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매순간이 막장이다. 열심히 곡괭이질을 하고 갱도를 열어 앞으로 나아가지만 거기는 여전히 땅속이다. 막장을 열어 지상으로 올라오는 구멍은 없다. 막장의 결국은, 더는 진로가 없어 퇴로를 열기 위해 후퇴하는 수밖에 없다. 남겨진 막장은 그 상태로 땅속에 굴로 남아 산하로 덮일 뿐이다. 인생의 모든 끝은 그러하여서 고작 잘 살았다 해도 땅속에 묻혀 뗏장을 얹은 잔디 아래에 눕는 것뿐이다. 성경은 이를 알게 하시려고 우리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여호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셨음에도 여전히 갱도를 파고 들어가려 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은 종의 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곡괭이질과 삽질을 해대느라 사는 게 고역이다.
그러니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합 2:19).” 훗날에 혈육을 묻고, 나무를 더듬고 흙에 절하며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것이 서로의 인생을 돌아봄이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4).” 그렇게 스스로 위로를 삼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엄히 경계하신다. 슬픈 감정도 일종의 자기 위로여서 우리의 분별력을 흐리게 한다. 친아들, 독생자 되신 예수님도 늘 하나님을 그저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거룩하신 아버지’라 하셨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시며 우리가 아는 아버지의 개념을 일축하셨다. 존경과 두려움은 편하고 좋은 관계 그 이상의 감정이다. 주를 경외함은 단지 두려움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그럼에도 경외함에 두려움을 같이 두는 까닭은 우리의 미약함을 일깨우고 경건함으로 두려워할 줄 아는 자로 삼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히 12:28).” 오늘 아침, 나에게 더하시는 말씀도 히브리서의 이 한 마디로 함축된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29).”
그래서 스바냐는 일갈한다.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께서 희생을 준비하고 그가 청할 자들을 구별하셨음이니라(습 1:7).” 떠벌여 누구와 견주고, 뭐라 지껄이며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은 두려워 떨어야 한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시 48:1).” 시편의 말씀은 어김없이 왜 그런가를 응축하고 있다. 사랑의 하나님, 자비의 하나님,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하는 감상적인 호칭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그 앞에 붙는 소유격조사 '~의'로 단정지을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저는 ‘소멸하는 불이시다.’ 긍휼이 많으신 그 이상의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 그 이상의 사랑이시며, 자비의 하나님 그 이상의 자비로움을 간직하신다. 어찌 누가 그 하나님 앞에 '~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제한하고 이도 모자라서 무슨 일이 터지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 하고 반문하겠나? 다만 우리는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9).” 나는 오늘 시인의 고백을 되새긴다. 세상을 둘러볼 때는 사는 게 다들 막장이라. 열심을 다한다고 다해 나름들 치열하고 처절하게 살아내지만 점점 더 땅속 깊이 파고 들어가는 갱도 저 끝모를 지경, 막장은 끝이면서 여전히 더 나아가야 하는 시작이겠다. 끝도 없이 빤한 시작이다. 우리는 다만 주의 전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할 따름이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4).”
그 비밀을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공유하심이었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그러므로 이제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8).” 아무리 저들이 세상을 호령한다 해도,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9).”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10).” 성령으로 안다. 성령으로 성경을 기록하신 이가 성령으로 이 말씀을 우리로 알아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게 하심이었다.’ 그러므로 부디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기를. 누구의 애끓는 사연이 변하여 주를 찬송하는 잔치의 자리가 되게 하시기를. 그것으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에스더 9:22).”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 48: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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