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전봉석 2020. 12. 13. 06:06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가랴 1:2-3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편 53:1

 

 

 

오늘 본문은 다리오 왕 2년, B.C. 520년 8월에 스가랴에게 임하신 말씀이다. 성전건축을 착공하고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중단되고는 16년간이나 방치되었다. 학개의 촉구로 다시 성전 재건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되었을 때 어려움이 따랐고, 이를 대적하는 무리가 나왔다. 그로 인해 같이 시작했던 이들이 나태해졌고 무력해졌다. 70년의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였다. 그 원인은 주의 은혜를 망각하였기 때문이고, 이방신을 섬기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과거의 불순종이 여전히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니 말씀을 전하는 이의 선포를 묵살하고 말씀을 배척하였다. 하나님은 그러함을 멸절하실 것이라 누누이 강조하셨는데도, 주의 긍휼하신을 안이하게 받은 것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고 네게 명령하신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와서 너를 따르고 네게 이르러 마침내 너를 멸하리(신 28:45).” 저들의 되풀이 되는 죄의 굴레는 오늘 우리의 의지나 노력과도 다르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믿음을 저버리고 말씀과 멀어지면 어김없이 마음은 세상으로 가게 돼 있다. 70년의 바벨론 포로생활로도 여전히 저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오늘 스가랴는 외친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1:2-3).” <돌아오라>는 이 말씀의 엄중함을 뜨거움으로 받을 수 있는 자가 복되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53:1).” 세상을 아무리 둘러봐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사는 데 다들 성공과 보람과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며 그것이 영원할 것 같은 착시를 느낀다. 오늘 스가랴 선지자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는 의미다. 그의 부친 베레갸의 뜻은 ‘여호와께서 축복하신다.’는 의미다. 증조부 잇도의 뜻은 ‘하나님의 때’라는 의미다. 신앙의 계승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되짚게 된다. 이는 역으로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런 스가랴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이 돌아보신다! 이와 같은 말씀은 여러 경로로 우리에게 와 닿는다. 사건과 사고를 통해, 누구의 권면으로, 우연히 읽은 책 한 줄에서도 하나님은 일깨우신다. 바울은 이를 강조하였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모처럼 아이와 통화를 했다. 나는 가감 없이 오늘의 세태와 우리의 나태와 그 안의 숱한 무력과 안일에 대해 기적하고, 이에 모든 걸 걸고 주를 바르게 따를 것을 당부하였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꿈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고, 좋은 친구를 사귀면서 위로를 받는 것도 좋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최선을 다해 사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설령 출세하고 성공하여 호령하며 떵떵거리며 한 생을 모자람 없이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해도 그 끝은 다 하나다. 우리는 늙고 병들고 죽는다. 무엇으로 이를 피할 것인가?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은 살아서 사는 동안의 날들로 족한 줄 안다. 말씀 놓지 마라, 기도 잃지 마라, 스스로 믿는다고 자부하지 말며 그 믿음으로 함몰되어 안이하게 굴지 마라, 돌아가는 세상과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를 보면서 악함의 정도를 가늠해라. 나의 말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쏟아졌고 아이는 이를 묵묵히 들으며 함께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우리는 언제든지 실족할 수 있다.

 

오늘 본문도 이를 다루며 죄의 족적을 가감 없이 기록한다. 그럴 떄면 우리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집중하게 한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2-14).” 정말이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할 때이다. 코로나 전염병이 창궐하여 하루 천 명에 육박하는 확진자가 늘어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설마, 하며 안일하다. 우리는 단지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주눅이 드느 게 아니라, 자신의 한계을 통탄하고 주를 더욱 의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러니 아이에게나 누구에게 그리 말해주는 사람이라 해서 나는 온전한가? 아,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이것이 나의 본질이다. 이를 무마하려 열심을 다한다고 하나 오히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하는 절규만 나올 뿐이다. 이것이 단지 바울만의 고백이겠나?

 

그러니 우리는 더욱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주의 도우심을 바란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이를 자칫 자학으로나 타학으로 받으면 사이코패스나 소셜패스가 된다. 소셜패스(socialpass)는 집단의 특정한 방향으로 끌려가는 성향이다. 자신을 집단화시킴으로 합리화하고 그래서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소시오패스와는 조금 다른 것이 소시오패스는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어느 것이든 미쳐 돌아가는 사회에서 우리의 이와 같은 성향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더욱 의뢰할 따름이다. 오늘 시인은 이를 절감하고 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시 53:2-3).” 곧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고 그래서 더욱 주를 멀리하려 드는 악의적인 성향에 대하여 주께 고하고 도우심을 바란다. 그러니 내가 누구보다 나아서 저에게 말로 권하고 말씀으로 위로하는 것이겠나? 오히려 내 안에 있는 악의 실체를 앎으로 나는 더욱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주의 도우심을 바랄 뿐이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렇지 않다.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4).”

 

오늘 시편의 말씀은 우리의 폐부를 감추기보다 낱낱이 드러내시는 것 같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아이가 ‘이런 소리를 듣고자’ 통화가 가능한지 물었고, 한 시간 넘게 아이와 통화하며 나는 주의 마음으로 당부할 수 있었다. 그러니 누구는 농담으로나 듣고, 누구는 귀 담아 듣지 않고, 누구는 아멘으로 받을 줄 모르고, 누구는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말일 뿐인데,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6).” 나는 나의 어려움이 아이를 더욱 이해하고 위하여 기도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하였다. 요즘은 어떠세요? 하고 묻는 아이에게 나는 어디가 아프고 어떻게 힘든지 숨기지 않았다. 말은 어폐가 있어, 그럼 나는 무사안일하고 아무 고통도 염려도 없이 살아야 할 텐데. 누구보다 약하고 지질한 나의 상황이 감사하였다. 곧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7).” 실제 어제는 잇몸치료로 받은 항생제와 진통소염제를 먹지 않았더니 온 몸이 다 아팠다. 어깨는 쑤셨고 팔꿈치는 힘을 줄 때마다 고통을 가했다. 허리는 삐걱거렸고 옆구리는 결렸다. 다리는 저리고 시려, 온 몸에 파스로 도배를 하듯 하고 오후 내내 우울하였다. 진통제를 먹으면 속이 울렁거렸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8).”

 

나의 이런 나의 어려움이 부끄럽지 않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나는 이제 이 말씀을 나의 고백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나의 어려움이 아이와 통화하면서 주의 뜻을 전하는데 더욱 절실하게 하였고, 나의 권면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와 내 품의 위로가 되었다. 아침마다 묵상하는 이 글을 열 명의 친구에게 보내는데, 누구는 자꾸 나에게 감사하다고 한다. 그러나 내 말이 아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오늘 나에게 더하시는 어려움도 육신의 고통이든 정신적인 불안이든 평소보다 안정제를 더 먹어야 하는 날이나 간신히 하루를 견딘 날이라 해도,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 누가 뭐라 하든 나는 나에게 더하시는 은혜로 받는다. 그러하기를 기도한다. 그러니 나의 자랑이 아니다. 나는 아이에게 말하길 ‘글방 선생’으로 좋은 사람이기 보다 ‘교회 목사’로 불편한 사람이기를 더 바란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71).” 이와 같은 말씀이 위로가 크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비록 십자가라 하더라도……

주께 더 나아가기 원합니다

-사자 플라워 아담스

 

이를 다시 말씀으로 되새기면, 세상은 두려워할 줄 모르나 나는 이제 두렵고 떨림으로 주 앞에 나아간다. 그것이 나의 고통과 염려 때문인 것 같으나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시 53:5).” 나는 오늘 말씀을 입에 머금으며 누구에게 들려주듯 나에게 말한다. 고로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97:10).” 나로 하여금 악을 미워하게 하는 힘은 나의 약함에서 더욱 강하여진다. 그렇게 오늘 말씀은 나로 하여금 다짐하게 하며 마무리하신다. 이내 나의 즐거움과 기 쁨은 주로 인한 것이고, 약속의 소망에 있다. 아이에게도 부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여러 믿음의 사람들에 대하여 읽고 묵상하라 권하였다. 저들은 비록 약속의 증거를 보지 못했으나 믿었다. 그 믿음은 이 땅의 경과가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의 영광이다. 이에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53: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