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전봉석 2020. 12. 15. 06:03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스가랴 3:3-4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55:22

 

 

 

우리의 약함이 우리로 주 앞에 세운다. 그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이에서 나온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와 같은 고백의 근원을 오늘 스가랴에서 찾을 수 있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섰다. 사탄은 이를 불에 그슬린 나무처럼 추하고 쓸모없음을 고발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는 사탄을 책망하신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슥 3:2-3).” 온전치 못한 우리의 면면을 들어 세상은 트집 잡고 이죽거린다.

 

그럴 때면 가까운 이의 지적과 바른말이 더 아프다.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시 55:12-13).” 아는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고 가까운 사람이 더 차가운 법이다. 심지어 나 자신도 이에 우울하여서 기가 죽는다. 나의 허물과 나약함을 나도 어찌할 줄 몰라 도망치고만 싶다. 이럴 바엔 어디 혼자 떨어져서 사는 게 더 나을 것만 같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6-8).” 그렇듯 우리 안의 죄책은 우리를 구석으로 몰아간다. 이때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슥 3:4).” 하나님은 그러한 나의 허물을 나무라시기보다 나의 그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으로 입히신다. 나를 공격하는 사탄이나 사람들이나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도 이를 용납하지 않으신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나는 오늘 말씀 앞에 한참 동안 시선을 두고 앉았다. 죄를 죄로 여겨 부끄러워하고 죄책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선 귀하다. 이를 두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고할 줄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임의 증거다. 이는 내 안의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심이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그래서 뻔뻔하지만 또, 다시 또 주 앞에 엎드려 고한다. 그러할 때,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 이와 같은 담대함은 이제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라는 증거이다.’ 그 증거는 성경과 기도로 나를 인도하신다. 돌아보며 자신을 점검하게 하신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산다.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거룩을 사모하게 한다. 종합하면 땅에 있는 것을 죽이려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12-14).”

 

육신대로 살면 육신으로 죽는다. 육신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른다. 내 안의 하나님의 영이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육은 자꾸 세상을 바란다. 그래서 성경은 더 적극적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우리의 육신이 추구하는 바는 하나님의 진노를 부를 뿐이다.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6).”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였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7-8).” 나는 이를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부끄럽다. 사탄은 이를 두고 내 안의 열등감을 더하거나 죄의식을 보탠다. 쥐고 흔들며 주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한다. 그럴 자격을 운운하며 내 곁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나를 비난하거나 멀리하게 한다. 내 안의 약함을 끄집어내어 미적거리게 하고 뭉개고 숨고 싶게만 만든다. 성경은 이를 미워하신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시 97:10).”

 

그러려면 육신을 죽여야 한다. 나는 목사가 되었으니 더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나는 이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니 그 정도면 됐다고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누구는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며 코로나 사태로 교회를 중단하였으나 누구는 내친 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간다고 새 힘을 낸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 하다못해 목표를 가진 운동선수들도 금욕과 절제의 삶을 자청하는데, 우리는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며 좌절하는 것이 어쩌면 마땅하다. 먼저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인정해야 한다. 내 힘으로 육신을 죽일 수는 없다. 나로서는 ‘따귀 맞은 영혼’을 달랠 길 없고, ‘마비된 영혼’을 다시 세울 힘이 없다. 그래서 주가 하신다.

 

이는 마치 손 마른 자 같다. 마비란 굳어버린 것이다. 펴거나 들어 올릴 힘이 없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 3:5).”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고, 손을 내밀라고 하시는 주님이시다. 남들이 뭐라 하든 ‘그 사람’은 어쩔 것인가? 손을 내밀라 하시는 이 어처구니없는 말씀에 어찌 호응할 것인가? 이러할 때 하나님이 하시도록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내가 사는 게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러다 보니 밑도 끝도 없는 상황인 것을 알지만 ‘손을 내밀라.’ 하실 때 마비된 손은 꼼짝을 않는다 해도 그러려고 하는 마음에서 이미 주님이 하고 계심을 안다.

 

친구는 부친의 폐암 판정을 계기로 떠나있던 친정오빠가 돌아온 것을 알려주었다. 그뿐 아니라 지난 주일에는 ‘이 와중에’ 아버지와 함께 '다시' 예배에도 나갔다고 좋아하였다.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더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는데, ‘마른 손이 펴져서 주께 손을 내민다.’ 엄연히 손이 펴진 것이지 손을 편 것이 아니다. 내가 한 게 아니라는 소리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친구는 그와 같은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전해주었고 나 또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들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친구에게 성경을 쓰면 어떨까, 권하였다. 저의 독특하고 예쁜 글씨체를 알기 때문에 성경을 쓰면서, 이 코로나로 인한 무료할 시기를 잘 극복할 수 있기를. 처음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좀체 진도는 나가지 않을 것이라, 여태 몸에 밴 생활습관이 그러하니 성경을 필사하면서 묵상을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이를 권하였다. 이제 우리는 ‘열매 없는 일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이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 어렵고 힘들 때 늘 같이 어울리던 ’유한마담들‘이나 무슨 동호회, 어떤 모임 사람들을 찾아가 시시덕거리며 위로를 도모하고 행복을 추구하던 일을 피한다. 저들의 행복 추구에는 열매가 없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요일 1:5).”

 

누구나 어려운 일 앞에서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게 돼 있다. 그것에서 위로를 얻으려 함은 인지상정이다. 저들은 한데 어울리면서 스스로 행복하자고 다짐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유행가를 읊조리며 지나간 날을 회상한다. 나름의 일들을 추구하느라 캠핑카를 꿈꾸고 ‘차박’이니, ‘야영’이니, 낚시나 등산 등의 취미로 암울한 시대를 이겨내려 한다. 그렇게 누구는 산을 타고, 누구는 악기를 새로 도전하며 나름의 행복을 모색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룩을 사모하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으로 가까이 가는 일은 귀하다. 같이 기도 제목을 공유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힘이 크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0-11).” 예전에 나도 그게 왜 죄인가? 하고 성경의 이러한 말씀을 물려버리곤 하였는데,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위로를 구하는 모든 것이 죄였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도 죄였다. 가까운 벗들도 죄였다. 유일한 행복의 순간이 실은 나로 하여금 죄로 가는 출구가 되었다. 안 믿는 친구들의 권유는 다들 그러하여서 그 자리에는 하나님이 없었다. 성경과 기도만 아니면 다른 모든, 친목이나 위로나 봉사나 헌신이나 그보다 더 그럴듯한 어떤 선행으로도 위안을 얻을 줄 알았다. 이것으로 그리움을 더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옛 노래에 젖어 ‘그때가 좋았는데’ 하는 길로 나를 이끌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새로 입히신 아름다운 옷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은 거룩의 옷이다. 이는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데 있어 이 땅의 육신을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갑옷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 조금은 모진 소리로 들렸을 지 모르겠으나 나는 친구에게 과감하게도 ‘고난이 우리로 주께 이끈다.’고 말해주었다. 결코 나는 ‘고난예찬론자’가 아니다. 나야말로 아픈 게 제일 싫다. 그러나 그것이 육신의 고통이든 정신의 고통이든, 고통은 가장 단순하게도 이에 구하여 줄 구원자가 누구신지를 바로 알게 한다. 같이 어울리던 ‘행복추구론자’들이 아니다. ‘멋진이상론자’들도 아니다. 특히 이상론자들은 자신이 자신의 죽음까지도 우아하게 대비하고 멋지게 맞이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나는 점점 나이가 들면서 이보다 개소리는 들어본 일이 없다. 심지어 학벌 좋고 공부 많이 한 누구는 죽음을 연구하며, 우리의 존엄을 강조하고 있다. 저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존엄한 자기 죽음의 결정권을 부르짖는 위인이었다. 가까운 이라 말을 더 험하게 할 수는 없겠고, 나는 이보다 더 오만방자한 교만을 알지 못한다. 하다하다 죽음까지도 자신의 선택을 강조하는 것인데, 저에게 하나님이란 뭣도 아니다. 그야말로 예수의 갑옷을 입지 않으면 저의 현란한 논리와 우아한 이상에 나 역시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래서 성경은 일침을 가한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 가까이 할 인연이 아니다. 저와 친하게 지낼 때는 그이의 말이 좋아서 나도 그때가 되면 나의 결정권으로 고통도 죽음도 존엄하게 내 의지로 장식하고 싶었다. 그러나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23).” 이는 매우 구체적이어서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 그만하면 됐다. 지나간 날들을 그리워하다 문득 말씀 앞에 붙들려온 기분이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4-5).” 그래, 그만하면 됐다. 나의 지난날의 기억은 말씀 앞에서 면구스럽다. 이제는 악의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23-24).” 그렇듯 새사람을 입을 수 있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나이 들면서 자주 되뇌게 하시는 말씀도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우리에게는 새로워지는 속사람이 있다. 그러니 그 마음의 허망한 것을 버려라.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엡 4:17).”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와 “옛부터 계시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들을 낮추시리이다 (셀라) 그들은 변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이다(시 55:19).” 그러는 저들은 그러려니 내버려두고 나나 온전히 바로 서자. 그러자면 나는 못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은 이 시국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22).” 다른 무엇이 이보다 더 위로가 되겠나?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