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스가랴 2:10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시편 54:4, 7
어려운 시국이다. 전염병은 창궐하였고, 생활은 위협 당한다. 무엇을 먹을거리로 삼을 것인가?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시 37:3).” 이 땅에 사는 동안 주의 성실함만을 ‘먹을거리’로 삼는다는 것은 불평하지 않는 일이다(8). 온유하며(11), 의로우며(16), 오히려 은혜를 베풀며(21), 자족하고(25), 주의 도를 지키는 것으로(34), 주께서 우리의 구원의 요새이시라는 사실을 '먹고' 사는 것이다(39). 병적으로 불안을 호소하는 나로서는 이와 같은 말씀을 준비하고 증거할 수 있어 축복이었고 은사였다. 그 의미는 배나 더하여 생생하였으며 실제적이었다. 이를 오늘 스가랴의 증거로 가져오면,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슥 2:10).” 하고 외치는 소리와 같다. ‘지금 시절’이 그럴 상황이 못 된다. 위기감으로 두려움과 괴로움은 엄습하고 있다. 그런 이 때에 하나님이 먼저 앞서 측량줄을 들고 달리신다!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하고 말할 때에(1-2).”
그리하여 우리의 요새, 성곽을 재건하심인데 단지 돌이 아니라 성령의 불로 에워싸신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5).” 이처럼 불로 둘러싼 성곽을 세우신다. 그뿐인가? 그 가운데에 영광으로 임하신다. 이를 오늘 시인은 순화하여 표현하기를,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64:4).” 고백하고 아뢰며,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7).” 하는 실제의 삶을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한다.
주일 날 설교로 같이 나누었던 말씀도,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37:4).” 이에 놀라운 변화는, 내가 지금의 이 현실을 속단하지 않게 한다. 설령 내가 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해도,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이와 같은 성경의 근거는 분명하다. 이중삼중으로 나를 보호하신다는 것. 그러므로 억눌린 두려움에 함몰되지 않게 하신다는 것. 그러니까 이 땅에 살면서 두려움이 없을 수는 없으나, 욥과 같이 나도 또한 나의 온전함을 포기하지 않게 하신다! “나는 결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내가 죽기 전에는 나의 온전함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욥 27:5).” 나의 이 온전함은 내 것이 아닌 것을 욥은 알았고 나도 알겠다.
욥은 말한다. “내가 내 공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내 마음이 나의 생애를 비웃지 아니하리라(6).” 남들은 물론이고 나도 나를 비웃거나 비하하고 낙심하지 않겠다는 소리다. 이는 내가 누구보다 낫고 좀 더 나은 의로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9:2).” 결국 나의 의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20).” 누구보다 내가 나의 죄로 부끄러울 뿐이지만, “주께서 나를 …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13:26-27).” 나를 측량하셨고, 기어이 새롭게 하신 이는 주님이시다.
놀랍게도 이 어려운 상황이 우리의 영혼을 소멸시킬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주의 영광을 찾고 주의 백성임을 확인시킨다.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에 머물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슥 2:11).” 알리라! 이는 어렵지 않고, 주께 돌아온 자는 안다. 참 아이러니하지만 사람은 본디 평안할 때는 주를 외면하다 위기가 닥칠 때 주를 찾고 바란다. 이 또한 주의 자녀이면 그렇다는 것이고. 그래서 욥은 스스로도 성결하였고 의로웠다. 저는 음란을 멀리했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 31:1).” 또한 죄가 있는 곳을 떠났고 이를 철저히 주의하였다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7).” 저는 일찍이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돌보았다.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18).” 그에 따른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24).” 그러한 저의 변론은 친구들의 공격에 대한 것지 자신에 대한 변호가 아니다. 그때는 몰랐다. 그럴 수 있었던 것도 주의 은총으로 거저 얻은 것임을 말이다.
설령 내 아무리 의로워서 나를 전부를 내어준다 해도,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유익이 없음은 그 끝이 일반이라 그러하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전 9:2).” 어느 누가 저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좀 낫다 하겠나?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3).” 인간으로도 욥과 비교할만한 의인은 없겠으나 저 또한 다를 바 없음과 같다.
그리하여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그로 인하여 내줌 바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면 우리는 모두 씻을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성경은 일갈하시길,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그러니 오직 하나의 길만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오늘의 이 모든 총체적난국의 시점에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간절함으로 주를 바라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면 우리에게 어떤 의도 없다. 오늘의 나로 온전함은 이 모든 날들과 나의 나 됨도 내 것이 아니다. 나를 의로 덧입히신 주의 것이다. 이에 나는 한없이 안도한다.
주일 오후, 기어이 천 명을 훌쩍 넘겨버린 확진자 소식에 두려움은 엄습하였다. 한 주간 더, 아니 어쩌면 올 겨울 내내 우리는 정지된 일상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위기감은 몰려와 목을 조른다. 그러니 일상 곳곳으로 파고든 앓는 소리가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때에 고통이 주는 교훈은 엄청난 값어치를 더했다. 첫째, 남이 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마라. 부화뇌동하지 말고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 욥처럼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의 믿음은 자신의 의로 인함이 아니어서, 나는 다행이었다. 이를 에우고 계신 주의 의로우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런 시국에 가장 경계해야 하는 일은 스스로의 자구책이다. 그것을 자신의 어떤 깨달음으로 알고 그 마음에 흔들리여 쓸려다니지 말아야 한다. 하나 더, 세 번째는 쓸데없는 죄책감으로 시달리지 않도록 한다. 자신이 잘못한 것들 때문에 치러야 하는 어려움인 것처럼 여기면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 너무 엄청나서 지레 질식하고 만다. 나는 여기저기 채널을 돌려가며 뉴스를 보았고, 보면서 두려움으로 신음하면서 고심하다 얻은 생각들이다. 그러다 이 아침 말씀 앞에 앉히시고 나의 그러하였던 마음을 회개하게 하심을 경험한다.
남의 말은 자꾸 남을 탓하게 하며, 자구책을 내놓을 때마다 저의 말에 동조하게 하고, 그만큼 또 누구에 대한 말에 덩달아 적대시하고 반감이 들기도 한다. 마음은 저 혼자 이처럼 흔들어대기 일쑤다.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사 35:4).” 저는 측량줄을 들고 앞서 달리신다. 우리의 요새이시다. 성곽을 성령의 불로 에워싸신다. 그 가운데 주의 영광이 함께 하신다. 오늘 스가랴의 증거를 나는 그리 듣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슥 2:10).” 그러니 누구 말에, 또는 이 현상에 쩔쩔맬 거 없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 세상이 어수선하다 보면 자꾸 복음 아닌 데 귀를 기울이게 돼 있다. “말들아 달려라 병거들아 정신 없이 달려라 용사여 나오라 방패 잡은 구스 사람과 붓 사람과 활을 당기는 루딤 사람이여 나올지니라 하거니와(렘 46:9).” 기죽을 거 없다. “그 날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의 대적에게 원수 갚는 보복일이라! 칼이 배부르게 삼키며 그들의 피를 넘치도록 마시리니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북쪽 유브라데 강 가에서 희생제물을 받으실 것임이로다(10).”
아침마다 이처럼 말씀 앞으로 나를 붙들어 앉히시고 주의 목소리를 듣게 하신다. 오직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15).” 양과 염소의 피가 나의 죄를 씻어준 게 아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죄를 고하며 주 앞으로 나아갔던 이들도 있었다.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나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시겠나? 나로 하여금 하나님만 섬기며 의지하게 하심이었다. 그리하시려고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7).” 말씀은 나를 붙들어 앉히신다.
오늘 스가랴도 전하기를,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슥 2:13).” 그러므로 나는 가만히 주의 말씀만을 응시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시 54:1).” 나의 의나 선행을 보고 하심이 아닌 것이다. 나의 굳건함과 올곧음으로 드릴 수 있는 기도가 아니다. ‘오직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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