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전봉석 2020. 12. 27. 05:55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말라기 1:11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편 67:7

 

 

구약성경의 마지막 장에 이르렀다. 앞으로 예수님이 태어나시기까지 400년 동안 저들의 마음에 요동칠 말씀이다. 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 하고 함부로 제사하고 위선적으로 경배함을 읽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돌아보게 된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 1:6).” 하나님께 합당한 제사가 드려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바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10).” 오늘 날 우리의 형식적인 예배와 그 형태를 돌아보게 된다. 더욱이 코로나 사태가 일고 믿는 자들의 예배는 무색해지고 민폐가 되는 듯 사회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을 경홀히 여김인지.

 

우리로 죄를 멀리하게 하는 것은 조심히 또는 경건하게 주를 바라야 하는데 이는 살면서 어찌 인위적으로 안 된다. 방법은 나를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불의와 의는 선명하다. 육의 일과 성령의 일이 분명히 다른 것과 같다. 나의 몸을 드린다는 게 무얼까? 욥의 자세는 중요하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 31:1).” 헛된 욕구에 끌려가지 않는 길은,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2).” 주를 바라고 생각함이다. 나를 그리 방치하면 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누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4).” 그러려면 오직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 마음은 어떠하신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6-8).” 자신의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고 낮추어 복종하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

 

내 몸을 내 맘대로 쓰던 예전 생활을 버리는 것이다. 낡아지는 겉사람을 꾸미느라 정신 팔릴 게 아니라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으로 주께 찬송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어떻게?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5).” 우리의 본분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이로써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14).” 우리는 이 땅에서 죽을 자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여기 이 땅에서 잘 살다 가는 게 능사가 아니다. 나를 새롭게 쓰시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오늘 우리 사회의 이 지긋지긋한 패거리 문화와 정치논리에 휘말려 어느 쪽에 서서 상대를 공격함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패러다임에서 빠져야 한다. 종종 누구와 이야기하다 보면 아무래도 현실을 말하게 되고 그럼 영락없이 정권을 운운하고, 각자의 논리로 두둔하거나 공격함으로 지지하는 세력을 좇는다.

 

누가 귀국을 저지당하며 수년째 억울함을 호소하다 현 정권을 강하게 비난하고 자신을 정당화하자 저의 유튜브에 후원금이 몰렸다고 한다. 그래서들 서로 자극적인 언동을 멈추지 않고 다투듯 막말을 일삼으며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조롱라고 비난함으로 돈벌이를 한다. 실제 그러한가 모르겠는데 누구는 개인방송에서 한 말을 하고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 48시간 경찰서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수천만 원을 후원금으로 받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저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말이 자신들의 영혼을 죽이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그러한 내 몸을 하나님이 받으시겠나?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19:20).” 오늘 말라기서의 내용은 수천 년 전에 저들만의 행태가 아니다. 앞으로 있을 4백여 년간의 암흑기는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우리의 영혼은 죽을 것처럼 끔찍하고 암울한 역사가 되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 6:9).” 우리는 결코 예전처럼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아무렇지 않게 저들과 다를 게 없이 살면서도 영혼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면, 죽었거나 병들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상관없는 자였다! 이는 우리가 저들과 다른점이다. 그렇게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것이듯 우리의 몸도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 성령을 받았는다는 것은 내 안에 주가 사신다는 의미이고, 내 안에 주가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생활로 채워나간다는 소리다. 그래서 도덕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게 아니라, 더욱 더 영적인 사람이 되어간다는 소리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나의 옛사람은 죽었다. 이것이 금욕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 나는 요즘 부쩍 늘어가는 개인방송을 별로 선하게 여기지 않는다. 유용한 정보를 같이 공유하고 알려 유익을 나누는 정도를 넘어 편을 가르고, 자신들의 주장을 일삼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네거티브다. ‘아니면 말고’ 하는 식으로 우선 싸지르고 말들이 태반이다. 이에 열광하는 구독자들이 늘고 후원금이 여느 직장인 1년 치 연봉을 훨씬 웃도니, 저나 저를 후원하는 사람이나 그들의 열심이 그들을 죽인다.

 

우리는? 우리는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는 자들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3-14).”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게 나를 맡기는 일이다. 거룩을 위해 우리가 직접해야 하는 일은 그것뿐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1:8).”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게 어떤 영웅적인 일을 도모함이 아니다.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2).” 그것은 무언가?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6).” 곧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7-8).”

 

요즘은 이처럼 나의 이런저런 이야기보다 주의 이야기에 더울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죄를 죽이는 일은 나를 죽이는 일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이다. 나를 죽인다는 것은 나의 감정, 나의 요구와 갈등에서 자꾸 놓여나는 일이다. 또 우울하고 또 불안하고 또 불만이 차고 또 누구를 탓하게 되면서, 나는 나의 마음과 그 관심에 회의한다. 죄는 자꾸 내 안에서 감사를 없이하고 불안을 조성한다. 남을 이해하게 하고 저를 힐책하게 한다. 누구 탓을 하며 그 때문에 나라가 이 모양이고 사람들이 저 모양이라고 원망하게 된다. 정작 해야 할 일은 마다하고 하고 싶은 일에만 집중하도록 한다. 스스로를 옳게 여긴다. 변명하고 자긍한다. 나는 내가 참 힘들다! 오늘과 같이 전염병이 창궐할 때는 물론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저항력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 무료한 시간, 나른하고 우울한 감정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 이를 위한 적극적인 대처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 늘 같은 공식을 갖는다. 첫째, 새사람을 입는 것.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24).” 곧 옛생활을 버리는 일을 소극적이라 하면 보다 적극적인 일은 새사람을 입는 일.

 

둘째,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다들 사느라 여념이 없어 유행에 민감하고 사는 보람을 이 땅에 둔다. 행복이 뭐 있나? 하고 저들은 사는 게 단순하지만 우리 믿는 자들은 의당 복잡하다. 최소한 육의 일과 성령의 일이 날마다 내 안에서 싸운다! 셋째, 심령을 새롭게 하는 데 집중하는 것. 그것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엡 4:22-23).” 그러자면 의식적으로 성경을 쓰거나 읽으며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어찌 됐든 말씀만이 우리의 골수를 쪼개로 심령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를 돕는 것으로 신앙서적을 읽어야 한다. 그런 데 관심을 두고 평생을 연구하며 살았던 이들의 삶이나 그 이론, 설교를 들어야 한다. 또한 그런 자들과 자주 대화해야 한다. 안 믿는 자들과의 대화란 늘 세상의 일이라, 한참 떠들고 나면 공연히 걱정과 근심만 인다. 성도들은 같이 돌아보아 권면하고 일상의 소소한 데서 주의 영이 어떻게 함께 하시는가를 살펴 서로에게 들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혼자 있든 여럿이 있든, 뭘 하고 있는 어디로 가고 있든 그렇게 우리와 동행하시는 이가 그리스도이시다.

 

결국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욱 더 살아야 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요즘은 불안과 우울이 주기적으로 온다. 어제는 종일 늘어져 아무 것도 하기 싫었다. 억지로라도 책상에 앉아 책을 뒤적거려보고 아침에 쓴 묵상글을 다시 읽기도 했지만 마음은 저 혼자 휑하고 어려웠다. 아,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하며 우리가 날마다 더해야 하는 것을 강조하였구나! 그리고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하는 저의 증거가 가깝게 여겨졌다. 주를 믿는다는 게 어찌 우리 의지로 이뤄지는 일이었나?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6).” 다만 겸손하여,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8-9).” 이러한 데는 무엇보다 자각이 필요하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이를 주께 아뢰며 도우심을 바라면서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 6:8-9).”

 

아, 주를 바람이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 67:1-2).” 그리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