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전봉석 2020. 12. 29. 06:12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라기 3:16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시편 69:33-34

 

 

묵묵히 또는 무던하게, 나는 종종 ‘노아’를 묵상한다. 저의 무던함을 사랑한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다는 게 그 긴 시간만큼 번민과 고뇌가 심상찮았을 텐데, 이를 어찌 감당하였을까? 오늘 말라기서의 말씀에서도 문득 노아를 생각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곧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낌’을 받는 일이다.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이 ‘섬김’이다. 막연하지만 한결같이, 기약이 없는 가운데도 길을 잃지 않게 하는 그것.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이는 숨길 수 없는 실제이고 감추지 못할 확신이다(말 3:17-18).

 

곧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주를 시인한다는 것은 ‘섬김’으로 무던함일 테고, ‘하나님의 아끼심’을 삶으로 체득하는 일이겠다. 그렇게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30-31).” 나도 모르는 내 머리털을 개수까지 다 세신 바 된, 하늘을 나는 참새도 돌보시는 이가 하물며 나의 가는 길을 모르실까! 우리 안의 불화는 당연하였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34).”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관계한다. 이는 싫고 좋음의 문제도,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다. 그런데 이를 흔드시기 위해 주가 오셨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5-36).” 서로의 불화를 위한 게 아니라 온전한 관계를 지키게 하려 하심이다.

 

가끔 이 대목에서 누구 생각이 난다. 저는 혼자 교회를 다녔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할수록 안 믿는 신랑과 자녀들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어찌 해도 저들은 교회를 싫어했고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저이는 말하길,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옥에 가고 자신만 천국에 가야 한다면 저는 과연 행복할까? 그러느니 가족들과 함께 저도 지옥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런 뒤 저이가 어찌 사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37-38).” 하시는 말씀에서 나는 ‘노아의 무던함’과 ‘섬김’의 원천을 짐작한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9).” 이 고백은 후대에 이르러 욥의 고백에 맥을 같이 한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22).” 이와 같은 고백이 가능할까? 나는 사실 두렵다.

 

나는 할 수 없으나 나로 할 수 있게 하신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7, 17).” 거듭나지 않으면 나로서도 나는 불가능하다. 이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일로,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일찍이 노아를 붙든 것은 ‘약속’이고, 오늘 우리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는 힘도 약속이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로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반석’이 되셨다.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사 8:14-15).” 곧 누구에게는 어리석은 소리가 되셨고, 누구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셨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덫에 걸려 잡힌 사회에 산다. 교회가 욕을 먹고 믿는 자로 사는 일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시절이다. 믿던 자들도 거리를 두고 자기들 살 궁리로 여념이 없다.

 

인생에 기근이 닥치면 살 궁리를 하다 모압 땅으로 들어간다. 엘리멜렉이 그러했다. 저는 유다 베들레헴 사람이다. 주를 경외하고 섬기는 자로 살다 흉년이 들어 그의 가족들을 이끌고 이교도의 땅으로 갔다. 그러나 곧 엘리멜렉이 죽었다. 어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의미는 뚜렷하다. 그로 인해 저의 처 나오미에게는 말론과 기룐 두 아들만 남았다. 저이는 모압 지방에서 며느리를 두었다.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고 하나의 이름은 룻이다. 그들이 거기에서 십 년쯤 살다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었다(룻기 1장). 나는 어제 새해 첫 날 아침 가정예배로 드릴 본문을 찾다 룻의 고백이 새해를 맞으며 우리 가족들에게도 동일하였으면 하고 정하였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6-17).” 그 동기가 된 것은 누가 이런저런 어려움을 장문의 카톡으로 전해왔다. 저이는 마치 ‘공포증 환자’처럼 자신의 염려로 목이 졸린다. 번번이 말씀을 알고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한데도 그와 같은 공포에 전율한다. 그럴 때 내게 주신 마음의 ‘룻의 고백’이었다. 곧 우리가 가는 길도 그러하기를.

 

실은 우리가 서로 같은 관심을 가졌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1:3-4).” 우리는 구원을 일반으로 받았다. 같은 구원인데 다른 느낌으로 산다. 각자의 느낌이 다르다 해도 성도의 ‘믿음의 도’는 하나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5-6).” 서로의 다른 사연으로 힘들어하나 그 고달픔은 우리로 더욱 간절하게 보다 절실하게 주를 바라게 하는 것은 하나다. 서로 떨어져 각자의 삶을 살며 저마다의 고통을 안고 가지만 그리하여 우리가 의지하고 더욱 바라는 것은 같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그런저런 이야기로 생각이 많았다. 누구의 사연에 나는 늘 감정부터 개입하여 안 됐고 안쓰러워하다 룻을 생각한 것이다. 오늘 말라기서의 공통의 언어는 그것이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 3:16).” 우리가 아뢰고 구하는 그이가 같고 그와 같은 간구는 하나였다. “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시 69:33-34).” 나는 이제 이와 같은 성경의 원리를 사랑한다. “곤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32).” 이를 알고 확신하면서 나는 나의 이야기가 결코 내 이야기로 국한되지 않고, 저의 이야기가 저의 사연으로 그저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통한다. 마치 군대용어가 같고 각국의 언어가 같은 것과 같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게 말한다.’

 

누가 나를 봐서 돈을 주겠나? 내가 저를 봐서 말을 받고 위로하겠나? 아니다. 그 너머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누구는 주의 이름으로 헌물을 보내고, 마음을 전하고, 서로를 격려한다. 누구의 일이 남 일 같지 않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으로 통일되게 하신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나 같은 게 뭐라고 날 보고 그런저런 말을 하겠나? 그게 아니라 주를 바람이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행 18:26).” 서로의 말로 하나님을 나타내려 하심이다. ‘말 안에 말이 있다.’ 말 속의 말은 확장하여 나의 이야기가 너의 이야기가 되고, 나에게 들리는 것이 너에게도 보인다.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이 모여서 난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도를 알고 배움이다. 내가 누구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나의 허물과 부족함까지도 주를 향하게 한다. 말을 하는 이나 그 말을 듣는 이나, 우리는 말 속에 담긴다. 나는 오늘 말라기서의 말씀을 그리 듣는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 3:16).”

 

이로써 서로에게 배움이 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저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에 새기다 나는 쪽지에 적어 옆에 붙였다. 볼 때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렇듯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0-11).” ‘모압’에서 잘 사느니, ‘유다 베들레헴’에서 죽겠다. 이 지명은 상징이다. 악인의 장막에 사느니 성전의 문지기로 사는 게 낫다. 왜? 하나님은 나의 해요, 나의 방패시다. 저는 내게 은혜와 영화를 주신다.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신다. 그리하여 누구의 사연을 들으며, 저가 잘 살고 있는지 어떤지 마음이 쓰이고 생각이 머무는 것이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15:1-3).”

 

서로의 돌봄은 같이 주의 자녀인 것을 알게 한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 12:26).” 누구의 소식을 접하고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다 무엇으로 위로하고 격려할까, 하는 수고는 덕이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후 11:29).” 서로의 마음은 같아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나는 늘 받기만 하는 사람 같아 송구하고 감사할 따름인데, 누구에게는 내가 하는 것도 없이 주고 있었다. 나는 한 게 없는데 저는 받았다 하고 나는 늘 받기만 하는데 누구는 준 게 없다고 하니, 나는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의 원리가 희한하게 늘 놀랍기만 하다. 딱 그때마침, 그만큼, 어찌 아시고 신기하게도! 그러므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묵묵히 또는 무던하게 앞으로 나아갈 따름이다.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시 69:6).” 곧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16).” 그리하여 “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원하시며 내 원수로 말미암아 나를 속량하소서(18).”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에 살며 소유를 삼으리로다

-35, 아멘.